2007년 03월 18일
지옥에서 저녁을 - 300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보고싶은 영화도 어영부영하다가 놓치고 주로 뒤늦게 DVD를 사서 보는
바람직하지 못한 버릇인지 습관인지가 몸에 붙은지도 꽤 되어버리긴 했지만
얼마 전에야 알아차린, 작년에는 단 한편도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이었습니다.
극장에서 본 최근작(...)이 재작년의 신 시티(Sin City, 2005)였던 셈이니
나름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을 차마 입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을 지경이죠.
이번 주말, 친구가 모처럼 영화를 보여준다기에 고르게 된 '300'이
신 시티와 마찬가지로 프랭크 밀러의 만화가 원작이라는 것은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지만
한편 -비록 원작을 보진 못했지만- 프랭크 밀러 분위기의,
화끈하게 과장된 고대판 신 시티를 기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개봉된지 며칠 지났으므로 여기저기서 영화 평은 많이 보이는데 대개 비판적인 내용이더군요.
그 비판의 한 축은 영화의 내용이 역사가 기술하고 있는 테르모 필레 전투와는 판이하다는 것인데,
제가 영화 제작진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300이라는 영화(및 그 원작 만화)는
'역사적 사실'에서 소재를 따왔을 뿐 '충실한 고증'과는 전혀 무관한 작품입니다.
무거운 갑옷과 장비로 중무장하고 철저히 진형을 이루어 움직이는 중갑보병 호플리테스가
-그 멋진 근육들을 보여주기 위해- 벗다시피한 모습으로 전장을 뛰어다니는 것에서부터
이미 이 영화는 고증과는 담을 쌓았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죠.
프랭크 밀러 특유의 마초적인 판타지 이야기에 대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이냐
하며 진위를 캐묻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뿐입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선명한 흑백 대비로 몰아가는 것도 만화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크게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 이란의 반발 역시,
우리나라의 고대사가 이런 식으로 그려졌다면 당연히 유쾌한 기분이 아닐 것인만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의 문제점은
만화적인 이야기를 만화답게 전개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대서사극 흉내를 내려 했다는데 있는것 같습니다.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전체적인 극의 흐름을 보자면, 관객들로 하여금 옥쇄하는 300명의
스파르타 군인들에 대한 감정 이입을 강요하고 있지만 이런 진부한 연출과 전개로는 역부족이죠.
레오니다스 왕이나 그 왕비의 대사들은 요 몇년간 뉴스에서 지겹게 들었던
어떤 강대국 대통령의 연설과 별반 다르지 않더군요. 전혀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영상에서도, 인간을 베어 죽일 수 있는 300가지(?) 방법을 통해
신 시티와는 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성대한 피의 살육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미 이러한 류의 연출이 흔해진 요즘 영화들 속에서 별다른 차별성을 가지지 못하는데다
동어 반복이 계속된 나머지 장면이 거듭될수록 지겨워지더군요.

이렇게 불필요한 말이 많고 CF적 연출만 나열하는 영화 본편보다는,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딧에 깔리는 흑적 투톤의 2D 만화풍 이미지와 연출이 오히려 특색있고 멋졌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런 만화적인 스타일을 기대했던 것인데...
같은 사람의 만화를 원작으로 해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또 만화를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역시 평범한 능력의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뜻밖의 구석에서 새삼 알게된 영화였습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이 영화가 제 기억에 남게 된다면,
아래 한줄의 폼나는(^^;) 대사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Spartans! Enjoy your breakfast, for tonight we dine in Hell!



by glasmoon | 2007/03/18 16:48 | Memory remains in... | 트랙백(4)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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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80년 크세르크세스(로드리고 산토르 분)가 이끄는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이 그리스를 침공하자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 분)는 신관과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300명의 전사로 테르모필레의 평원에서 맞서 싸웁니다. ‘씬 시티’의 프랭크 밀러 원작의 만화를 영화한 ‘300’은 개봉 전과 국내 시사회, 미국의 개봉 첫 주 수입 등에서 압도적인 기대감을 선사했습니다. 그러나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눈에 띕니......more

Tracked from 바스티스의 왕따 콜로니 at 2007/03/19 18:29

제목 : 30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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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렉시즘(rexISM).. at 2007/03/21 08:05

제목 : [300] : 허장성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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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버섯돌이 at 2007/03/18 22:48
처음부터 그랬지만.. 역시 안끌려요..;
Commented by swanybak at 2007/03/18 23:29
TV에서 전투씬을 다 보여줬지만..그래도 오랜만에 극장가서 재미있게 봤던 영화였습니다.

살아있는시체들의밤을 리메이크 했을 때 부터 참 맘에 들던 감독이었는데 요번에 아주 확 빠져들었네용.

Commented by wan2tree at 2007/03/18 23:33
저는 참 재밌게 봤습니다. 피와 살이 튀는게 먼지 보여 주더군요..
Commented by 르네 at 2007/03/19 00:22
영상미가 좋다고 해서 기대했습니다만, 생각보다 뛰어나지는 않아서 실망했던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볼만했엇던 부분을 꼽자면 이모탈의 드롭킥 장면. (...)
Commented by 루피 at 2007/03/19 10:24
봐야할지 말아야할지.. 살짝 고민스럽습니다~ 대체로 비판적이네요 ㅎㅎㅎ
Commented by 대마왕 at 2007/03/19 13:10
처음에 아~무 정보없이 저 한쪽 눈에 흠집간 아저씨를 보고 한니발인가? 했었는데..
나중에 제대로 광고를 보니 그게 아니었더군요....
삼! 백! 이 광고음성이 맘에 안들어서 안볼...............(안보는 이유가 좀 빈곤...)
Commented by glasmoon at 2007/03/19 21:45
버섯돌이 님 / 그럼 사람 대신 버섯들이 뎅강뎅강 잘려 날린다면... 의외로 재미있으려나요^^;?

swanybak 님, wan2tree 님 / 재밌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노렸던 포인트가 빗나가버려서..^^

르네 님 / 등장 전 수식어구가 번드르르하길래 임모탈들 얼마나 싸우나 했는데, 좀 실망이었어요!

루피 님 / 그냥 기대없이 액션 영화로 보면 나름 괜찮습니다. ^^;

대마왕 님 / "삼! 백!" 으음... 어떤 의미로 독특한 느낌의 제목이었습니다. 크크.
Commented by EST_ at 2007/03/20 02:13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가 각별한 재미를 한껏 느끼고 온 영화였습니다.
다른 분들의 감상을 읽어 보니 감독이 고도의 방법으로 거대한 힘의 상징인 미국을 조롱하고 있다는 의견 등도 있던데,
영화 전체를 극중 화자인 달리오스의 이야기에 철저하게 입각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신 분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더군요.
(영화상에서 과장되거나 편파적인 요소들 모두가 그리스인들을 독려하는 달리오스의 감정과 관련된 것이라는 이야기였어요)

Commented by glasmoon at 2007/03/20 20:03
EST_ 님 / 저는 그런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는것 자체에 놀라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제가 미처 느끼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가요!?
Commented by June Huh at 2007/03/27 04:58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 전투에서 모두 몰살당한 것은 아니고 아리스토데무스(Aristodemus)와 판티테스(Pantites) 두 사람 살아남습니다. 영화에서는 이상하게 아리스토데무스가 달리오스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나중에 레오니다스 사후 1년뒤 페르시아군이 재차 쳐들어왔을때 선봉에 나서는 인물로 나오고 있습니다만... 원래 기록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리스토데무스는 눈 부상 때문에 역시 눈부상을 당한 에우리투스(Eurytus)와 함께 스파르타에 돌아가서 전황을 전하라고 명받아서 스파르타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에 반해 에우리투스는 장님이 되었음에도 불구, 스파르타로 오던 중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서 싸우다 레오니다스왕과 함께 전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아리스토데무스를 에우리투스와 대비, 겁쟁이의 캐릭터로 이야기하고 합니다만.. 아무튼 영화에서는 좋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생존자 판티테스는 원군을 요청하러 레오니다스에 의해 파견되었던 인물인데 전장터에서는 죽지 않지만 나중에 돌아와보니 300명의 동료들이 몰살 당한 것을 보고 슬픔을 견디지 못해 그 자리에서 자살하고 말앗다는 것이 역사 기록에 있습니다.
Commented by June Huh at 2007/03/27 05:04
그리고 역사에 기록되있는 레오니다스의 명언은 "Spartans! Enjoy your breakfast, for tonight we dine in Hell!" 이 아니라 영화에도 나옵니다만 크세륵세스가 땅을 바칠것을 강요하며 항복을 권유하자 레오니다스가 당당히 답한 말인 "와서 가져가보라" (Come and get them. ( Μολών Λαβέ.) ) 입니다.

이 말은 이후 수많은 정치가들에 의해 다시 인용되기도 한 그리스인들이 제일 자랑스러워 하는 명언 중에 하나입니다.
Commented by glasmoon at 2007/03/27 19:44
June Huh 님 / 좋은 자료와 말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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