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3월 02일
언제든 어디에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세상에, 이건 전쟁이구만. 달리 무슨 말을 하겠어.
...지난주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이들은 방을 노인들에게 빌려준 후
죽이고 뒷뜰에 묻고나서 그들의 연금을 챙겼다. 범인들은 처음에 노인들을 고문하였으며...
아니 도대체 왜? TV가 고장나 심심해서?"

"사람이 어찌 이럴 수 있나. 한줄 더 읽어보자고.
...한 남자가 집에서 개목걸이만 걸고 뛰쳐 나왔을 때야 비로소 이웃들은 경계했다.
하지만 범인들이 뜰에 무덤을 파고 있을 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런 일들은 더이상 갱들이 설치는 미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치안이 비교적 좋다는 이 나라에서도 이제 저런 기사가 뜬다고 호들갑을 떨 사람은
-볕이 드는 창가나 공원에 앉아 신문을 펴든 나이 든 '노인'들을 제외한다면- 거의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겹쳐 떠올랐던 10여년 전 샘 멘데스의 "아메리칸 뷰티"가
더이상 '미국만의 아름다움'은 아닌 것처럼.

이제 헐리우드에서도 중견의 위치를 다진 코엔 형제는 드디어 마땅한 장(場)을 만났다.
탄탄한 시나리오의 상당 부분은 원작에 힘입은 바이겠지만
음악과 액션은 거의 배제한 채, 효과와 편집만으로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가히 최고.
젊어서는 해리슨 포드를 잘도 쫓아다니다가 이제는 늙고 지쳐버린 토미 리 존스는 물론이고
작년 말 "아메리칸 갱스터"의 양아치 형사에서 은퇴한 조쉬 브롤린,
"고스포드 파크"에서 노부인의 잔소리를 듣다 결혼한 켈리 맥도날드,
심지어 뜻하지 않게 등장한 우디 해럴슨까지 '이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의 연기를 보였다.
그리고 하비에르 바르뎀... 그의 이름과 이미지를 이제 잊을 수 없겠지.
언젠가부터 빵봉투를 뒤집어쓰고 전기톱을 든 사내가 하나의 클리셰가 된 것처럼
몇년 후에는 B급 호러 게임의 살인마 캐릭터로 가스 봄베를 든 삼각머리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네카의 '컬트 클래식' 등으로 피겨가 나올지도 모르겠군.

다만 한 가지, 코엔 형제의 영화치고는 뒷맛이 쓰다.
역시 있는 그대로의 현실만큼 냉혹한 것도 없는 것일까.
한때는 날렸을 명 보안관도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희생자들을 거둔 후
꿈 속의 아버지의 뒤를 따를 날만을 기다리는 것 뿐.


"가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어. 너를 기다려주지도 않을 거고.
...다 그런거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리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by glasmoon | 2008/03/02 17:12 | Memory remains in... | 트랙백(1)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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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렉시즘 : ReXism at 2008/03/05 11:37

제목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불가해의 속수무책의 세상. 이제 노인들은 현자인양 지혜를 들려주지도 못한다. 그저 이 황망한 시대 속에서 마른 침을 넘기며 황혼을 닮아간다. 장정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절뚝거리며 욱씬거리는 육신을 추스리며, 아이들은 돈맛을 알아간다. 피묻은 돈이나마 쥐고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때, 인간의 역사는 더 많은 피를 콸콸 쏟아낼 것이다. 최소한의 음악과 배우들의 호연 속에 탄생한 황량한 걸작.+ 우디 해럴슨이 얼마나 반갑던지. 이 양반도 한때 잘 ......more

Commented by swanybak at 2008/03/02 17:23
정말 보면서 소름 끼치는 영화는 처음이었어요. 특히나...하비에르바르뎀의 연기....우어어.
Commented by 버섯돌이 at 2008/03/02 22:03
못 보겠어요. ㅠ_ㅠ
Commented by 두드리자 at 2008/03/02 22:49
현실은 강하죠.
Commented by 갈가마신 at 2008/03/02 23:52
그러니까 존 람보같이 늙어야 해요
환갑때도 기관포를 갈길수있게..
Commented by 동사서독 at 2008/03/03 00:54
갈가마신 님/ 기관포 실컷 갈기고 난 후, 젊은 커플(!)을 바라보는 외로운 솔로- 람보 영감님의 그 허탈한 웃음... 그것이야말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Commented by TokaNG at 2008/03/03 01:36
아아.. 점점 보고싶어지네요...ㅜㅡ
Commented by glasmoon at 2008/03/03 13:27
swanybak 님 / 별로 짧은 영화도 아닌데 후다닥 지나가버리더군요. ^^

버섯돌이 님 / 왜? 왜 못봐요??

두드리자 님 / 그러게요. 가는 세월 그누구가~

갈가마신 님, 동사서독 님 / 으하하하~~ 존 람보가, 그런 겝니까? 푸하하~~

TokaNG 님 / 국내의 반응이 시원찮은듯 하니 보려거든 서두르셔야 할지도?
Commented by PERIDOT at 2008/03/04 10:17
집에다가 샷건 하나씩하고 장도 하나 정도 갖추는게...
Commented by glasmoon at 2008/03/04 15:03
PERIDOT 님 / 그보다는 역시 가스 봄베가 구하기도 쉽고 실용적??
Commented by 전갈 at 2008/03/05 01:00
우어... 못보겠구나...-_-;;;
Commented by glasmoon at 2008/03/05 15:04
전갈 님 / 화면에 묘사되는 수준이 너무 잔혹하다거나 하는건 아니에요. ^^;
Commented by 락키드 at 2008/03/10 11:19
아아아아아아아. 하비에르 바르템~!!!
카운터 아저씨에게 동전 던져놓고 골라보라는 그 씬의 긴장감은 한동안 정말 잊기 힘들듯.

그나저나 일요일에 연달아 이 영화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니 아직도 미국서부가 눈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_-
Commented by glasmoon at 2008/03/10 13:42
락키드 님 / "...블러드"를 아직 못봤습니다. 근데 어찌 그렇게 개봉관 수가 적은 거래요? 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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