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Ride of the Glas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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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 엘 그레코, 반젤리스 by glasmoon



미술사 관련 책을 들춰보면 16세기 후반 즈음에서 '매너리즘'이라는 사조가 등장합니다.
현대에도 관용적으로 쓰이는 익숙한 단어인만큼, 또 그 단어의 당시 의미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만큼
교양 서적이나 강의 등을 접한 분이라면 어렵지않게 기억하시겠군요.
그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명으로, 엘 그레코(El Greco)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도무지 16세기의 것으로는 믿기 힘든 그림이지요.
르네상스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매너리즘의 회화가 다소 기괴한 방향으로 나가기도 했다지만
그 중에서도 엘 그레코는 특히 개성적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당대에는 별다른 빛을 보지 못했고
20세기에 들어와 독일의 표현주의가 등장한 후에야 재평가를 받게 됩니다.
진부한 문구를 붙이자면 이른바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중 한명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죠.
저로서는 표현 양식 자체보다도 그의 그림에 담긴 일종의 귀기(鬼氣)랄까,
화면 겉으로도 안으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빛과 어두움의 대비에 매료되어버린 경우입니다만. ^^;



그런데 '엘 그레코'는 그의 본명이 아니죠.
El Greco, 즉 그가 활동했던 스페인의 말로 '그리스인'이라는 그의 별명대로 그리스 크레타 출생인
그의 본래 이름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Δομήνικ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

그러나 그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 즉 엘 그레코는 스페인에서 활동했고 또 죽었던만큼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스페인에 남아있어서 정작 그의 고향인 그리스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국가적인 미술가로 추앙받고 있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1995년, 그리스 국립 미술관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성 베드로"를 가져오기 위해 캠페인을 벌였는데
그 중 하나가 현재 그리스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자리잡은 반젤리스,
아니 에반겔로스 오디세아스 파파타나시우(Ευάγγελος Οδυσσέας Παπαθανασίου)에게 음악을 의뢰한 것이었습니다.
반젤리스가 엘 그레코의 세계를 음악으로 표현한 음반은 3천장 한정 생산되어 국립 미술관에서만 판매되었는데
두 거장의 이름이 한데 모인 상승 효과인지, 구할 방도가 없는 팬들의 요청이 쇄도하게 되었고
그 결과 반젤리스는 음악을 다시 손질하고 추가하는 등의 작업을 거쳐 정식 음반으로 내놓게 됩니다.


사실 위에 링크된 그림 소개 동영상에 배경으로 쓰인 음악도
반젤리스의 "엘 그레코" 제8악장(movement VIII)의 일부이죠.
9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던 팝적인 감각이 희석되기 시작하고 전위적인 이미지가 강조된 이 앨범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라면 명소프라노 몽셰라 카바예가 참여한 제4악장(movement IV)이겠군요.




그리스 출신의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과 현대 음악의 거장이 만난 이 음반은
그 상징성만으로도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정작 반젤리스의 음악은 이후 "미소디아(Mythodea, 2001)"나 "알렉산더(Alexander OST, 2004)"에 이어지면서
오히려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지적을 받는 것이 절묘한 타이밍의 아이러니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작년 그리스에서 엘 그레코의 일생을 다룬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되었습니다.
이름이 이름인만큼 국가적인 지원과 예산이 쏟아부어졌다는것 같은데
아무리 그러한들 그리스의 영화는 철저하게 제3세계의 작품이다보니 세계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못했죠.
작품의 완성도야 어찌되었든 꼭 보고싶은 작품이건만 개봉은 고사하고 DVD조차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어디 영화제같은 곳에 초청받을 일은 없으려나요. 그리스 대사관에 문의해보면 뭐라 답해주려나?
아, 물론 영화의 음악은 다시 반젤리스가 맡았습니다. ^^


미술인지 음악인지 영화인지 주제 모를 포스트가 되어버렸군요.
일단 지난번 "남극 이야기"의 반젤리스가 발단이었던만큼 음악 쪽으로 넣습니다. ^^;


3월의 눈, 남극 이야기, 반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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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FAZZ 2008/03/07 23:40 # 답글

    매너리즘이 현재 안좋은 쪽으로 쓰이는 만큼 미술사조로써 매너리즘은 원어인 마니에스리모로 표현하는것이 좋겠다 요즘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리 매너리즘이 나쁜뜻이 아니라고 설파하고 미술사조라 이야기 해도 안먹히죠 이제는.

    그나저나 반젤리스 무지 좋아하는 아티스트인데 정작 앨범 산건 거의 없군요 OTL
  • 두드리자 2008/03/08 01:51 # 삭제 답글

    4세기씩이나 앞서가면 확실히 빛을 보기 어려웠겠군요. 저도 저 그림을 보고 16세기를 전혀 떠올리지 않았으니.
  • 태두 2008/03/08 08:17 # 답글

    오오 저 아저씨 그림 간지[....]비슷한 맥락에서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도 좋아라 합니다. 아악 센스쟁이들.
  • Werdna 2008/03/08 09:19 # 답글

    전 반젤리스 음반이라고는 "블레이드러너" OST와 베스트 모음집 뿐이죠. ^^;
    그나저나 저 음반이 정식발매 되었을 때, 어렵게 한정판 샀던 사람들은 피를 토했겠습니다.
  • glasmoon 2008/03/09 01:32 # 답글

    FAZZ 님 / 완전히 굳어져버린 단어라 이제 바꾸기는 쉽지 않겠죠? 그런 예 많잖아요~ ^^

    두드리자 님 / 저 그림은 그중에서도 많이 튀는 편이지만, 전체적으로 현대 미술에 가까운건 사실입니다.

    태두 님 / 오호, 그러고보니 그레코와 보쉬가 갖는 미술사적 위치나 역할도 유사점이 있군요. ^^

    Werdna 님 / 한정판과 후의 출시판의 음악이 같지 않은데다 워낙 포장이 화려했기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가치는 유효하다고 합니다만... 독점욕이 강한 사람들은 배가 좀 아프긴 했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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