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20일
배트맨 비긴즈 on score


저로서는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작품에서 사용되었던 곡들 중에서 중요한 곡들을 추려내어 담은 앨범.
가장 베이직한 경우겠군요. 때로는 영화 대사의 일부마저 포함하여 감흥을 더하기도 하죠.
다른 하나는 보컬곡이 많이 삽입된 경우, 연주곡을 제외하고 그 노래만을 수록한 앨범.
한때 유행한 콘셉트인데 록 음악이 많이 사용된 액션 영화들 중 상당수가 이러했군요.
마지막은 영화와는 별도로, 심지어 사용되지 않은 곡을 포함하여 어레인지를 거쳐 독자 구성된 앨범.
이 경우는 첫 번째 유형의 사운드트랙이 히트한 뒤, 번외로 나오는게 보통이긴 합니다만.


엔니오 모리코네, 존 윌리엄스 등과 함께 할리우드 영화 음악의 거장으로 통하는 한스 짐머가
그에 못지않은 커리어를 가진 제임스 뉴튼 하워드와 함께 작업한 "배트맨 비긴즈(2005)"의 음악은
저에게 두 번의 놀라움을 안겨준 작품이었습니다.
우선은 영화에서, 현악기를 저렇게 효과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앨범에서, 영화에 삽입된 곡들을 저렇게 짜임새있게 연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죠.
이 "비긴즈"의 음악은 그 대부분이 영화에 사용된 거의 그대로이므로 첫 번째의 경우가 되겠지만
곡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잘 짜여져 있어서 마치 세 번째 경우인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비긴즈"의 사운드트랙은 각 곡들이 생소한 라틴어 제목을 가졌다는 점이 특이점이기도 한데
Vespertilio로 시작해서 Lasiurus로 마무리하기까지, 모든 곡명이 박쥐의 학명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죠.
앞뒤의 여섯 곡을 제외한 중간의 여섯 곡이 머릿글자가 B-A-T-M-A-N으로 맞춰지게끔 연결되었다는 것은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에 팬들이 너무 호들갑을 떠는게 아닌가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잘 짜여졌더군요.

"비긴즈"의 음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현악기의 활용입니다. 서정적인 드라마라면 모를까,
액션 블록버스터에서는 빵빵 울려대는 관악기와 타악기의 남용이 관례화된지 오래지만
이 음악은 그 관습적인 관악/타악의 상당 부분마저도 현악기가 커버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죠.
물론 이에는 다분히 자기 성찰에 가까운 영화의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많지는 않아도 적재적소에 배치된 관악기와 타악기의 역할은 그래서 더욱 부각되고 있기도 합니다.
사운드트랙에서 현악기, 관악기, 그리고 건반악기(피아노)는 명확하게 그 역할을 분담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악기는 박쥐, 관악기는 영웅, 피아노는 추억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01 Vespertilio
#02 Eptesicus
#03 Myotis


링크한 유튜브의 음질은 저질(...)이므로 CD나 벅스, 멜론 등을 이용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대충 그린 악보는 역시 적당히 봐주시고..;;

첫 곡 'Vespertilio'는 전주이면서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제시합니다.
동물적인 박동에 이은 단3도 스타카토의 긴장감, 단2도로 오르내리는 호흡, 관악기의 영웅적 외침까지.
이 세 부분은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어 이후에 계속 그대로, 또 변주되어 등장하게 됩니다.
이어서 'Eptesicus'에서는 서정적인 부분을 등장시켜, 피아노로 연주되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G 단조에서 현악기에 의해 연장된 D-F의 메인 테마를 들려주는데, 같은 음을 공유하는 이 두 선율 중
'Vespertilio'의 단순한 D-F를 배트맨의 테마, 이 연장된 것을 브루스 웨인의 테마라고 잠시 이름붙여봅니다.
세 번째 'Myotis'에서는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한 긴장이 고조된 끝에 드디어 사건이 터지고야 말죠.
하지만 치닫던 사건은 갑작스럽게 끝나버리고, 그 빈 자리에는 브루스 웨인이 홀로 남습니다.
브루스 웨인의 유년기를 다룬 이 세 곡은 하나로 묶어 서곡으로 볼 수도 있겠죠.
그리고 드디어 '배트맨'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04 Barbastella
#05 Artibeus
#06 Tadarida


'Barbastella'는 죽음 뒤의 고독과 슬픔으로 시작합니다.
피아노는 남겨진 추억의 단편을 들려주고 있지만 그것은 이제 현실이 아닌 과거의 잔향일 뿐이죠.
그리고 다가오는 알 수 없는 동물의 흔적과 소리 속에서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이 되기를 결심합니다.
'Vespertilio'의 진행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부분이지만 테마가 계속 D 단화음 위에서 진행되지 않고
마지막을 선언하듯 Bb 장화음으로 울리는 것은 그 결심의 단호함을 잘 보여줍니다.
'Artibeus'와 'Tadarida'는 모두 박쥐, 또는 박쥐화에 관한 것이지만 그 입장이 다르죠.
'A'에서 박쥐를 맞닥뜨리고 동화된 브루스는 'T'에서 그것을 밖으로 발산합니다.
즉 'A'의 박쥐가 공포라면 'T'의 박쥐는 분노인 셈인데, 곡의 뒷부분은 그 분노 속에 담긴 것이
깊은 슬픔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07 Macrotus
#08 Antrozous
#09 Nycteris

'Macrotus'는 모든 이야기의 전개상 빠질 수 없는 전환부가 되겠죠.
"비긴즈"의 이야기에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레이첼의 등장이 이에 해당됩니다.
피아노 파트는 'Barbastella'에서보다 생동감이 있지만 그러나 완전히 밝지도 않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하는 같지만 다른 두 사람,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의 고뇌가 이어지죠.
'Antrozous'에서 배트맨은 드디어 전면에 나서 활약하며 적들에게 박쥐의 공포를 선사합니다.
4연음에서 당김음으로 리듬이 바뀌고 선율 폭이 확대된 박쥐 테마가 시원하게 질주하는 가운데
배트맨도 그 테마를 변주해가며 성큼성큼 뛰어다니고 있죠.
그러나 정의를 행한다는 배트맨 역시 사회적 정의의 테두리 밖에 있기에 그 끝은 밝을 수 없고,
'Nycteris'에서 다시 어둠 속의 박쥐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제 밝은 세상은 추억과 꿈일 뿐이죠.
여기까지가 배트맨, 'B-A-T-M-A-N'의 이야기입니다.


#10 Molossus
#11 Corynorhinus

이어지는 'Molossus'와 'Corynorhinus'는 다분히 형식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의 소용에 의해서든, 음악에서의 이야기 진행에 의해서든 말이죠.
'Molossus'는 'Antrozous'의 확장과 연장이지만 배트맨의 영웅적 면모를 확실하게 드러냄으로써
이야기의 절정부를 연출합니다. 웅장하고 일직선인데다 귀에 잘 들어오니 곡의 인기도 높다던가요.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Corynorhinus'는 'Nycteris'의 보다 관습적인 재편성이라 할 수 있겠죠.
갈등이 해결된 후의 안도,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 등을 'Eptesicus', 'Macrotus'에서 사용되었던
서정적인 선율들을 재등장시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배트맨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이렇게 해서 새로운 배트맨(BATMAN)의 시작(BEGINS)을 마무리합니다.

#12 Lasiurus


처음의 'Vespertilio'가 전주라면 마지막의 'Lasiurus'는 후주 정도가 되겠군요.
작품을 지배하는 D 단조가 아닌 G 단조에서 강한 인상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배트맨의 테마이자 그 이면인 브루스 웨인의 테마 하나를 가지고 계속적인 반복과 상승을 통해 끌어가면서
배트맨이 되어 배트맨으로 살 수밖에 없는 브루스 웨인의 내적 갈등을 상징합니다.
이 배트맨의 탄생담이 결국 호쾌한 영웅의 전설이 아니라 한 개인의 비극이며,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앞으로도 이어질 것임을 말하는 것이죠.


이상의 번드르르한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전체 곡들이 매우 일관되게 흐른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영화의 서사적 구조와 함께, 비록 외부의 사건이나 인물의 흔적이 조금씩은 보이더라도,
이 영화와 음악이 철저하게 브루스 웨인이자 배트맨인 사나이의 내면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면모에 보다 집중하자면, 전체 곡을 연이어 듣는 것보다 V-BATMAN-L만으로 연결하여 감상하면
조금은 다른, 또 새로운 배트맨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다분히 영화와 배트맨 이야기의 틀 안에서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을 통해 나온 것이므로
실제 한스 짐머나 제임스 뉴튼 하워드가 꼭 저대로 생각해서 곡을 썼을 리는 아마도 만무합니다.
그러나 곡을 쓰는 작곡자의 의도와 그것을 읽는 해석자의 의도가 꼭 같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음악 분석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니까...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는 정도로 보아주시면 되겠습니다.

한스 짐머도 그렇고 제임스 뉴튼 하워드도 그렇고,
할리우드 영화에 딱 맞는 곡들을 많이 쓰는 스타일이어서 제가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건만
두 사람이 만나 만든 이 "배트맨 비긴즈"의 음악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완성도가 높다고 평합니다.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 영화 속에 쓰인 곡들을 수록하고 있으면서도
영화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음악만의 독자적인 구조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죠.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한스 짐머의 최고작으로 여겨지는 이 음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크 나이트"의 음악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다크 나이트의 음악 얘기를 조금 해보려다가 이 무슨 짓인지..--;
참, 영화음악 관련 수업에서 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이 엉터리 날림 분석을 베끼거나 참고할 경우
그 뒤에 듣게 될 꾸지람이나 망신에 대해 저는 전혀 책임지지 않습니다. ^^;


박쥐가 사람이 되는 방법, 배트맨 비긴즈

기대의 저편,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in IMAX

by glasmoon | 2008/08/20 17:53 | Dark knight in... | 트랙백(2) | 핑백(1)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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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잠본이 at 2008/08/21 00:01
역시 액션보다는 스릴과 서스펜스 위주라 그런지 음악도 웅장하거나 커다란 곡조보다는 신경을 살짝살짝 건드려주는 게 많더군요. =]
Commented by 두드리자 at 2008/08/21 00:07
영웅이라....
영웅은 끝이 안 좋은 경우가 많은데, 만약 배트맨이 하나로 완결된 작품이었다면 그 끝은 배트맨의 죽음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Commented by 후니훈 at 2008/08/21 00:13
전 4번트랙 마지막 부분이 좋더라구요. 다크나이트 예고같은것 끝날때 장엄하게 울려퍼지면 기대감 대폭 상승~
Commented by 네티하비 at 2008/08/21 01:12
음악과 영화를 둘 다 이해할 수 있어야 쓸 수 있는 좋은 내용입니다. 종종 음악을 들을 때 느낌으로는 이해하지만 음악적 지식의 부족으로 그걸 글로 표현할 때 어떻게 써야하는지 막막한 경우가 많은데 역시 아는 것이 힘입니다. 대충 그렸다는 악보가 글을 돋보이게 하는군요. (^.^);;
Commented by 컬러링 at 2008/08/21 09:23
저로선 힘든 내용 이네요
하지만 느끼는(?) 분들에게는 좋은 내용일듯..^^:
Commented by 니트 at 2008/08/21 11:11
첫 곡인 Vespertilio 는 그야말로 비긴즈라는 제목처럼 '시작' 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더군요.. 그래서 제일 인상이 깊고 좋았습니다. (그냥 자주 나와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glasmoon at 2008/08/21 12:37
잠본이 님 / 사건 묘사보다는 심리 묘사에 치중한 느낌입니다. ^^

두드리자 님 / 그 비슷한 대사가 다크 나이트 속에서 나왔더랬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다크 나이트의 결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 듯합니다.

후니훈 님 / D-F의 테마가 항상 D 단조 위에서 불안하게 이어지는데,
그 부분만은 Bb 장조로 내려와 메이저 코드로 빵~ 하고 터져주니까 말이죠.
실질적으로 '배트맨의 탄생'을 의미하는 선언적인 부분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

네티하비 님 / 무슨 말씀을. 그나마 좀 배웠다는게 이거라 끄적거려 보았을 뿐인데요.
깊게 파지 않고 쉽게 쓴다고 썼는데... 그게 또 어렵네요. --a

컬러링 님 / 곡을 세세하게 편집해서 언급하는 부분을 바로바로 들려드릴 수 있었으면
이해하기 편하셨을텐데, 저작권 문제는 둘째치고 너무 귀찮아서... o<-<

니트 님 / 놀란 배트맨의 모든 음악을 하나로 압축시키라면, Vespertilio가 될 겁니다. ^^
Commented by 바스티스 at 2008/08/21 14:02
해설을 읽자니 영화 OST로서가 아니라 그냥 컨셉 음반 자체로서의 재미도 충분해 보이는군요.
정작 비긴즈 보면서도 그렇고, 원래부터 별로 OST에 귀기울이는 편이 아니라 관심이 없었는데, 문득 사서 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불쑥...

이..이걸 노리신건...- -;;
Commented by 스푸키캣 at 2008/08/21 14:49
다크나이트의 OST 역시 현악기의 사용이 훌륭했어요.
한스짐머나 제임스뉴튼하워드는 모두 뛰어난 영화음악가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자기표절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에서는 대가의 저력을 보여주는듯해 반가웠습니다.
Commented by Dr.hell at 2008/08/21 21:21
아직도 다크나이트 를 못봐서 별달리 할말은 없습니다만, 팀버튼 배트맨의 대니 앨프만 음악은 제에겐 확실히 각인 되어 있네요.. 특히 팀버튼 첫 배트맨 영화 오프닝에서 거대로고 카메라 훑으며 서서히 울리는 배트맨 음악이란..

제발 9월초 까지 극장에 걸려 있기를..!
Commented by glasmoon at 2008/08/23 12:55
바스티스 님 / 네. 영화를 떠나 앨범 자체가 꽤 재미있습니다.
그걸 노린건 아니지만 사서 들어볼 가치는 충분하죠. ^^;

스푸키캣 님 / 곡들간의 유기적 연관성은 비긴즈에 비해 좀 떨어지지만 또 색다른 가치가 있었죠.
그것도 어설픈 썰을 좀 풀어봐야 하는데... 음냐.

Dr.hell 님 / 엘프만의 음악은 '쓰는 입장'에서 볼때 참 대단하죠. 그 많은 선율들을 어떻게 쏟아내는지. orz
다크 나이트가 9월 초까지... 걸려 있을까요? 어떨까요? 호호~
Commented by bluenlive at 2009/01/10 22:00
이런 먼치킨 급 비긴즈 OST 관련 포스팅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만, 머릿속에 남은 건 별로 없고... 대단하단 말밖에...)
Commented by glasmoon at 2009/01/11 19:41
bluenlive 님 / 말씀 감사하지만, 간만에 다시 읽어보니 완전 수박 겉핥기인데요.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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