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3월 15일
그 남자의 쇼, 더 레슬러


나는 그저 체육 수업의 시작 종소리가 울려 황급히 마룻바닥을 뛰어가는 참이었다.
선생님이 아직 나오지 않으셨다는 걸 확인하던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을 때,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친구의 팔이 가슴께에 와닿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날았다.
... 등의 통증은 중요하지 않다. 숨이 들여마셔질 뿐 내뱉어지지 않는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걸 느낀다. 이런 젠장, TV에서는 하나도 안아퍼 보이더만.




그 시절 남자아이치고 WWF(이제는 WWE라나)에 열광하지 않았던 이가 몇이나 되련가.
굳이 따지자면 열광한 쪽에 꼽히지 않는 나도 '헐크 호건'이나 '얼티밋 워리어'를 비롯해서
'자이언트', '빅 보스', '언더테이커' 등등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그 시절, 남자아이들 사이의 주된 논쟁거리중 하나는
과연 WWF를 비롯한 프로레슬링이 진짜 경기인가 짜고하는 쇼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가 입장할 때 울려퍼지는 콰이어트 라이엇의 빛바랜 헤비메탈 노래와 마찬가지로
이제 퇴락한 랜디 로빈슨의 레슬링은 과거 영광스러웠던 나날의 희미한 잔향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피를 흘려가며 상대 선수와 손발을 맞추는 경기도 분명 하나의 쇼이겠으나
우스꽝스러운 비닐 캡을 쓰고 샐러드 바에서 일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가 말하는 '쑈'에 가깝다.
(링에 입장하듯 관객의 환호성이 아련히 들려오며 카메라가 그의 등을 따라가는 장면이란!)
새로운 도전을 잠시 즐기기도 하지만, 쇼는 결국 쇼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쇼는 끝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진정한 쇼이자 마지막 쇼를 준비한다.

이 영화의 감성은 "록키 발보아(2006)"보다는 오히려 "분노의 주먹(1980)"에 가까워 보인다.
"록키 발보아"가 적지않은 헛점들에도 불구하고 30년간 쌓인 캐릭터의 힘이 스스로를 구체화하였다면
"더 레슬러(2008)"에서 링을 오르내리는 랜디 로빈슨과 그를 연기하는 미키 루크의 경계는 희미하다.
랜디는 링 안에서 쇼(경기)를 하고, 미키는 스크린 안에서 쇼(연기)를 한다.
미키 본인에게도 스스로의 가장 어두웠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 묵직한 작품이 되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지적하는 바다.
이 역이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돌아가지 않은 것은 영화에서도 그의 인생에서도 천만다행이랄 수밖에.

랜디의 마지막 비상과 함께, 미키는 배우라는 게임의 2 라운드를 시작했다.
그들의 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남자가 사는 법, 더 레슬러

by glasmoon | 2009/03/15 16:38 | Memory remains in...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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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TokaNG at 2009/03/15 17:00
아아.. 정말 멋진 영화였습니다.
마치 인간극장을 보는 듯한 자연스러움에 깜짝!
미키 루크의 열연에 레슬러들의 기립박수가 절로 나왔다고 하더군요.
Commented by 앞치마소년 at 2009/03/15 21:57
레슬링 기술들이란게...잘 맞아주는 요령이 없으면(때리는 요령도 필요하지만요;) 죽어라 아프죠[...]
Commented by 두드리자 at 2009/03/16 00:20
그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Commented by The_PlayeR at 2009/03/18 00:40
궁금해 어떻게 보게되었지만...DVD로 빨리 나와주길바라내요...소장가치있는 작품...크..눈물이...
Commented by glasmoon at 2009/03/19 02:36
TokaNG 님 / 보면서도 이게 랜디의 얘긴지 미키의 얘긴지. 크윽.

앞치마소년 님 / 그러게요. 당시 전 요령도 없었던데다 그야말로 불시에 당한 거라 그야말로 죽을 맛. 털썩.

두드리자 님 /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나 아직 죽지 않았어!"라는 외침을 들었습니다.

The_PlayeR 님 / 역시 필소장 타이틀 되겠습니다. T_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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