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Ride of the Glas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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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추억, 그리고 희망 by glasmoon





제 머리 속에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또 지금까지도 대표되는 이미지로 완전히 자리잡은 것은
충격적으로 데뷔했던 5공 청문회의 스타라기보다 3당 합당에 반발하는 "이의있습니다!"였습니다.
먹고 살기에 바뻐 정치 이야기는 나올 틈이 없었던 집에서 자라왔던 어린 소년에게
1989년의 청문회는 '방금 전까지 그렇게 찬양받던 각하가 대체 무얼 그리 잘못했단 말이냐?'는 충격과 함께
최초로 정치와 통치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깨너머로 신문을 보다 이듬해인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을 발표할 때
'이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비록 옆에서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죠.
그 두 현장에 모두 '노무현'이라는 세 글자 이름이 있었던 것이 단순한 우연이었을까요.

시간이 흘러흘러 저는 대학생이 되고 어쩌다보니 그와 명륜동 동네 이웃이 되었을 때,
그의 지지자라고 할만큼 지원을 보낸 것도 없지만 실로 '바보같은' 그의 행적에 관심이 있었고
이 사람이 성공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몇 년 후, 그야말로 기적적인 우여곡절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열광할 수밖에 없었죠.
아, 정말 그 시절에는 얼마나 신이 나던지. 그러나 그에게 건 기대가 너무나 컸던 탓일까요.
그에게 보냈던 지지는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등 굵직한 현안을 거치며 점점 가늘어졌습니다.
고백합니다. 술먹고 욕도 많이 했습니다.
대연정 때 전혀 생각없는 여자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추태는 보기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힘을 잃어가며 대한민국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했고, 저는 고향으로 내려간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당신은 역시 서울의 푸른 대궐보다 촌의 흙바닥과 논두렁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미 카터처럼 재임 시절의 평가는 높지 못하더라도 퇴임 후 더 빛나는 대통령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더랬습니다.

돌아보건데 저는 그에게 고운정 미운정 온갖 오묘한 정이 들었던 것은 확실하나
어제 모인 수십 만의 사람들처럼 "그를 사랑했다"고 외치지는 못하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사랑이었을까요.


그는 분명 하는 일들이 어설프고 시행착오도 많은 아마추어였습니다. 그러나 확고한 신념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일은 좀 하는지 모르나(딱히 그런것 같지도 않지만) 신념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전술이 없는 전략은 승리에 이르는 가장 느린 길이지만
전략이 없는 전술은 오로지 패배일 뿐이라는 것은 2천년 하고도 한참 더 전부터 주지된 사실입니다.
제1 공화국의 시작으로부터 60여년, 대한민국의 민주 정치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정치 이야기는 꺼리지만 손놓고 보내기엔 안타까워 기억을 되살려봤습니다. 이젠 이것도 추억이 되겠죠.
그리고 언젠가를 향한 희망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덧: 위 사진은 당시 경상일보 기자였던 김종구님께서 찍은 것임을 밝힙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43844
미처 사전에 알지 못해 무단으로 올린 점 사과드리며, 늦었지만 넓은 이해를 구합니다.


덧글

  • R쟈쟈 2009/05/30 11:07 # 답글

    며칠전에 뉴스보다보니 눈물이 나더군요.

    요즘들어 좀 부정적이 되었는데도 눈물이 나는 걸 보면 저도 이사람에 대한 미운정&고운정이 많이 들었던듯...

    유리달님의 포스팅을 보고 엊그제 옛집 마당에 불붙힌 담배를 꽂고 노통을 생각했던 일이 생각나 끄적여 봅니다...
  • 플로렌스 2009/05/30 12:08 # 답글

    저 당당하고 신념에 가득차 보이는 사진 좋군요. 여러가지로 어설펐지만 지금 정부처럼 악질로써 완벽한 것보다는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 mithrandir 2009/05/30 12:57 # 답글

    꼭 희망이 되어야죠. 아니, 희망으로 만들어야겠죠...
  • draco21 2009/05/31 00:24 # 답글

    ... 언젠간 되찾은 그날 옛말하듯이 말하는 그런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zeck-li 2009/05/31 03:02 # 삭제 답글

    노무현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사람이었으며 그런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 대한민국의 최후는 매우 흉하게 끝날 껍니다.
  • 大望 2009/05/31 12:43 # 답글

    저도 대학 다닐때 명륜동 살았었죠. 주소지를 옮기지 않아서 투표권은 없었지만, 4학년때인 96년에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종로구 후보로 나온 걸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 쥐쉑히가 이겼죠? 그때까지만 해도 쥐섹히를 사람쉑히로 여기던 시절으로 덤덤했던 기억이 납니다.
  • 김종구 2009/05/31 17:53 # 삭제 답글

    위 사진(이의있습니다) 찍은 사람입니다....김종구 ...011-366-2626...출처를 밝혀주시거나 전화 한번 주시기 바랍니다
  • glasmoon 2009/05/31 23:31 #

    제가 미처 출처를 알아내지 못해 그냥 빌려 썼네요.
    넓은 이해를 구하며, 본문 수정했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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