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Ride of the Glas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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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인생 단 음악, 크레이지 하트 by glasmoon



짤막한 이야기 하나.
밴드를 막 시작했을 무렵인 구세기 말, 세간에 '나는 21세기의 음악을 한다'는 모 음악가가 있었다.
연습 후 쉬면서 그 이야기를 하며 어디가 미래의 음악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가벼운 농담이 오가던 중에
나는 '21세기의 컨트리 음악인가보죠'라 말했고, 그 직후 선배에게 '뒤지게' 혼났다.
몇 년이 지나 귀가 좀 트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편협한 관점에서 무지한 비유를 했는지 깨달았다.

짤막한 이야기 둘.
우리나라의 공중파 드라마는 전문성을 표방하더라도 결국 전부 연애담으로 귀결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드라마나 영화가 내세우는 전문성이 관련 종사자가 보기엔 터무니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 또한 공공연한 이야기.
같은 이유로 나도 음악을 다룬 작품들(최근이라면 "베토벤 바이러스"나 "원스")을 좋아할 수 없었으나
어떤 하나는 다른 이유에서 차마 보지 못했고, 결국은 뒤늦게 보면서 내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음악을 하거나 했던 모든 이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깨진 거울같은 영화.




그냥 생각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보니 참으로 연관성이 희미하다 싶지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아니 보기 전 대강의 얼개만 들었을 때부터 바로 이 두 이야기가 떠올랐었다.
그리고 스크린 속에서 왕년의 컨트리 스타 배드 블레이크는 술에 절은 채 허름한 공연장을 맴돈다.

한때 잘 나갔으나 이젠 퇴락해버린 늙은 거장이 어찌어찌 새출발한다는 감동적인 드라마는
이제와서 다시 쳐다볼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관습적이며 또 흔하다.
다분히 '뻔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던 이 영화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주인공 배드 블레이크, 그러니까 제프 브리지스의 믿기 힘든 연기 때문이겠다.
온통 어질러진 싸구려 모텔방에서 속옷 위로 뱃살을 늘어뜨린 채 술병을 들고 포르노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오스카에 수 차례 노미네이트되었던 명배우가 아니라 배드 블레이크 바로 그 자신이다.
또 그 주위의 인물인 매기 질렌할, 콜린 파렐, 로버트 듀발은 적소에서 그와 화면을 더욱 빛나게 한다.
(진심으로 말하건데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콜린 파렐이 호감으로 다가온 영화는 이 작품이 처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T-본 버넷이 만들어낸 음악과 훌륭한 녹음. 비록 컨트리에는 문외한에 가깝지만
제프 브리지스가 직접 현을 퉁기며 부르는 노래는 공감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녹음은
"샤인 어 라이트"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보다 더 나은 경우가 있었는지 쉬 기억나질 않는다.
단, 번역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원어로라도 노랫말을 자막으로 넣어주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조기 학습이나 어학 연수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져 살아온 나로서는 가사를 반이나 알아들었으려나.

이 작품의 성격과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는 필연적으로 작년의 "더 레슬러"와 미키 루크를 떠올리게 한다.
굳이 꼽으라면 나에겐 이 "크레이지 하트"보다 "더 레슬러"가 한 걸음 가까이 위치하기에
미키 루크의 오스카 탈락은 -비록 그 상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다시 한 번 아쉽다.
(숀 펜은 전에도 받았고 앞으로도 받겠지만 미키 루크에게 언제 또 기회가..TT)
예술과 마주한 인생의 묵직한 울림은 화려하진 않으나 깊이 또 오래 남는다.

...and this ain't no place for the weary kind
this ain't no place to lose your mind
this ain't no place to fall behind
pick up your crazy heart and give it one more try...


그 남자가 사는 법, 더 레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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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rk Side of the Glasmoon : 2010 유리달이 본 영화들 2011-03-04 02:3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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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박이반 2010/03/13 08:42 # 삭제 답글

    젤 밑에 꼬부랑글씨도 해석이 안되는 저...
  • f2p cat 2010/03/13 21:20 # 삭제 답글

    관람 전이지만 이 또 뒷목 잡게 만드는 영화 같아 두렵네요.
  • 부드러운자비들 2010/03/13 22:47 # 삭제 답글

    로버트듀발도 왕년에 스타 컨츄리가수였지만 알콜중독으로 완전 노숙자로 전락했다가 재기하는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상 수상했었는데요... 제목이 텐더 머시스http://movie.naver.com/movie/bi/mi/detail.nhn?code=15223
  • 부드러운자비들 2010/03/13 22:49 # 삭제 답글

    그리고 텐더머시스의 여자주인공은 노인을 위한나라는 없다에서 토미 리 존스의 부인으로 나놨죠.
  • glasmoon 2010/03/14 00:10 # 답글

    박이반 님 / 포기하지 말고 한번 더 잘 해봐라~ 뭐 그런 얘기 같습니다. ^^;

    f2p cat 님 / 어떤 의미의 뒷목 잡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후회하진 않으실 겁니다. ^^

    부드러운자비들 님 / 오호, 그런 영화가 있었군요. 근데 DVD도 미발매고... 볼 방도가 없네요.
  • 내일공방 2010/03/14 18:28 # 답글

    저도 더 레슬러가 떠올랐습니다.

    다음주 까지 시간이 안되는데 그때까지 할려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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