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Ride of the Glasmoon

glasmoon.egloos.com

포토로그



흩어져가는 환상의 밤, 일루셔니스트 by glasmoon



현란한 형광색들이 눈을 찌르지 않았던, 보다 부드러운 색으로 물들었던 한 세대쯤 전의 언젠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세상 속에서 어느덧 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한 늙은 마술사가 있다.
관객이 있으면 공연하고, 없으면 쉬고, 어딘가에서 불러주면 떠나는 그러한 인생의 막바지에
짐이라고는 마술 도구와 소개 포스터, 뚱뚱한 토끼 한 마리, 그리고 낡은 사진 한 장 뿐.
과학 기술이 마술보다도 더 마법같은 일을 보여주게 된 시대.
그는 유랑의 끝에 다다른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자신의 마술을 동경하는 한 소녀를 만난다.
그리고 소녀와 함께 또다른 여행을 시작한다.




...는 내용인 줄로만 알고, 내심 심드렁한 기분으로 극장에 갔더랬다.
아닌게아니라 필요 이상의 사전 지식은 작품 감상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입장에서도
불가피하게 접하게 되는 전단지나 예고편 등으로부터 받은 느낌은 딱 그 정도,
그러니까 '인생은 아름다워'라거나 '그 시절이 좋았지'와 같은 그런 흔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서두의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며, 이 작품을 그렇게 받아들인들 잘못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끌렸던 것은, 무어라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화면 때문일테다.
드로잉의 터치를 그대로 남긴, 그야말로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대로 그림인 배경 속에서
다채롭지만 경박하지 않은 색상과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며
더불어 극도로 절제된 대사는 오히려 그들의 행동에 이유와 생동감을 부여한다.
시대착오적이라 할만한, 아니 능히 시각적 사치라 할만한 2D적 아름다움의 홍수 속에서
탈것이나 기계장치, 일부 가구 등을 3D CGI로 처리한 것에 대해서는 살짝 아쉬운 느낌도 있었으나
후반의 어느 장면에 이르러 그런 아쉬움마저 싸그리 날아가버렸다.
단언컨데 디즈니의 1991년판 "미녀와 야수" 이래 개나소나 다 하면서 식상할대로 식상해져버린
'CG 배경 돌리기'(?)를 보며 감동먹은 것은 이번이 유일하다. 그래, 도구를 쓰려면 이렇게 써야지.
작품은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과 그에 어울리는 동화처럼 뻔한 감동 드라마에 그칠 수도 있었건만
노마술사와 소녀의 관계는,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상은 통속적인 바램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수더분했던 소녀의 세련되어가는 모습이 -더불어 바꾸어 입게되는 복장이- 디즈니의 몇몇 공주님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마저도 다분히 의도된 부분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노마술사는 엉겹결에 떠맡아버린 소녀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위장 취업(?)까지 감행하지만
도시로 나와 새로운 세상과 조우한 소녀의 그것은 끝을 모르고 한없이 팽창해간다.
그리고 그들의 곁을 맴도는 것은 인형과 함께할 최후의 만찬을 소녀에게 부탁한 복화술사,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다 만찬의 수프 한 접시를 얻고서 허겁지겁 들이키는 빨간 코의 광대,
그 반대편에는 관객들의 억지 공감을 조장하다가 출연료를 갈취하는 극장 관계자,
마지막 남은 얼마 안되는 돈을 모르는척 꿀꺽해버리는 정비업소 사장...
이 모든 것들은 더없이 아름다운 그림 위에서 한층 더 선명하며 슬픈 역설이 된다.

프랑스의 채플린이라는 자크 타티가 이 극본을 완성하고도 영화화하지 못했던 까닭은
그 내용이 외견상으로도 함의적로도 너무나 자신과 흡사했기 때문이라던가. 그렇기에
실뱅 쇼메를 통해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것은 탁월한 해답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쓸쓸한 환상의 밤은 이토록 아름답게 흩어져간다.


덧. GR의 에피소드 제목을 차용한 것 맞다. 그 주옥같은 명문들은 단서만 있으면 바로 튀어나온다;;


덧글

  • 노이에 건담 2011/07/06 04:18 # 삭제 답글

    같은 제목의 영화 '일루셔니스트'가 생각나네요..^^
    거기에 나오는 오렌지 씨앗이 나무로 변하는 마술의 트릭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 2011/07/06 08:5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플로렌스 2011/07/06 09:43 # 답글

    아...이 애니메이션;; 시사회에 가기로 했다가 사정상 못가서 미련이 많이 남았던 작품입니다.
  • 침묵중 2011/07/06 17:01 # 답글

    아름답지만 너무 지독하게 공허하게 만들어주더군요. 오히려 아름다워서, 절제되서 더욱 지독하게 텅비게 만들어주었던 애니매이션이었네요
  • glasmoon 2011/07/07 18:14 # 답글

    노이에 건담 님 / 그 영화는 못봤습니다;;

    비공개 ㅌ 님 / 정말이지 지방 분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합니다.
    서울에도 개봉관을 한손으로 꼽는다지만 그래도 어찌 시간을 맞추면 볼 수라도 있지.
    저도 DVD 나오면 바로 구입할 생각입니닷.

    플로렌스 님 / 꼭 보세요!

    침묵중 님 / 공감합니다. 크레딧 올라간 뒤의 그 서비스가 그나마 여파를 줄여주더군요.
    보고 나와 빗속에 마시는 술이 참 달면서도 쓰더랍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