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캠벨의 심폐소생도 한 번이지 두 번 통할까 싶냐던 비웃음을 멋지게 날려버린 "카지노 로얄"이 무색하게
시리즈를 다시 진창에 처박아버린 마크 포스터의 "퀀텀 오브 솔러스" 이후 어느덧 4년.
스크린에서는 제이슨 본이, TV에서는 잭 바우어가, 그외 수많은 아류(?)들이 점령해버린 작금의 상황에서
이제 50살이나 먹어버린 제임스 본드가 찾아야할 길은 과연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역할이 샘 멘데스에게 주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일단 환호했다.
이유인즉 그의 전작들을 돌아볼때 현 상황에서 007 시리즈에 가장 부족하다고 비판받는 부분,
즉 잘난 영국 한량의 뻔하디 뻔한 영웅담에 입체감과 드라마를 부여하는데는 확실하다고 여겼기 때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는 확실한 반면 액션 연출에 있어서는 거의 검증된 바가 없다는게 일말의 불안이었지만
별별 기상천외한 액션이 난무하여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면 다 평범해 보이는 형편이니
드라마와 액션 둘 중 하나를 놓아야만 한다면 차라리 액션을 접는게 낫다고 생각될 판이었으니까.
그런데, 역시 깊게 묵은 시리즈의 관록에 힘입은 걸까. 이 양반, 그 두 마리를 정말 다 잡아버렸다.
그리고, 언감생심 기대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길을 펼쳐보인다.
"스카이폴"에서 제임스 본드는 스펙터나 그와 유사한 세계적 규모의 범죄 조직을 상대하지 않고,
공산권이나 핵무기 유출을 막고자 동분서주하지도 않으며, 거대 재벌이나 미디어 그룹과 대결하지도 않는다.
그가 이번에 상대하는 실바는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었으되 50년간 쌓인 본드 자신의 과거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이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구절을 댈 것까지도 없이, 거울처럼 속속들이 알고있는 또다른 자신이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화려한 특수장치 없이도 본드와 그의 조직 MI6를 최고최악의 위기로 몰아넣는 속에서
샘 멘데스는 현재와 과거(또는 미래)의 대결이라는 구도 속에 시리즈 전통의 요소들을 끄집어내어 배치하고
산발적으로 보이던 이 조각들은 하나씩 짜맞춰지며 007의 새로운 세계로 멋지게 재구축된다.
거기에 힘을 불어넣는 것이 주디 덴치, 하비에르 바르뎀, 랄프 파인즈, 알버트 피니 등 배우들의 연륜이요
런던, 이스탄불, 상하이, 마카오, 폐허섬, 스코틀랜드를 오가는 기막힌 그림들은 덤이라기엔 너무 큰 눈호강?
"카지노 로얄"이 캐릭터로서의 제임스 본드를 되살려냈다면
"스카이폴"은 시리즈로서의 007을 되살렸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퀀텀..."이 말아먹지만 않았어도 멋진 현대적 프리퀄(?) 3부작의 최종장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지.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오래된 시리즈를 -비록 한시적이더라도- 스스로 마무리짓는 매우 뛰어난 예라고 한다면
"스카이폴"은 오래된 시리즈를 다시 되살리는 또한 뛰어난 예라고 꼽는데 주저할 수 없으리.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그리고 이따금 다시 날아오르기도 한다.
덧1. 아, 그러고보니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배우를 인식했던 것이 세자르 카푸르의 "엘리자베스"와 더불어
샘 멘데스의 걸작 중 하나인 "로드 투 퍼디션"이었으니 이 둘의 인연이 깊은 것일지도.
덧2. 여러모로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영향도 느껴지겠다, 놀란도 007 시리즈의 팬이라고 수차례 공언해왔겠다,
그가 다음 007을 만든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
덧3. 도유샤의 애스턴 마틴 DB5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영화에 힘입어 타미야에서 새로 내준다면 정~말 좋을텐데.
007 제임스 본드: 코네리 에라
007 제임스 본드: 무어 에라
007 제임스 본드: 달튼 & 브로스넌 에라
아버지의 길, 로드 투 퍼디션
덧글
정말 화려하면서도 멋들어진 올드패션의 향연이었는데, 딱 하나 아쉬운거라면 마티니 주문하는 장면이 없었다는 거.
어쨋든 스카이폴, 개인적으로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부디 흥행에도 성공해야 다음번 007 영화도 수월하게 나올텐데 말이죠..
요즘엔 하이네켄 광고에 나오는 다니엘 크레이그 보면서 위안을 얻고 있습니다.^^;;
DB5의 기어 봉 뚜껑을 열고 눌러버릴까 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ㅎㅎ
나이브스 님 / 후... 정말이지 퀀텀은 잊고 싶습니다.
시대유감 님 / 주문하는 장면은 없었지만 잔을 건네받으면서 '잘 했네(흔들었네)' 식의 대사는 있던 걸로?
hioka 님 / 결국 Q도 머니페니도 돌아가신 뒤에야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네요.
노이에 건담 님 / 이정도의 완성도라면 흥행 걱정은 안해도 될것 같습니다.
크레이그라니까, 저번 올림픽 때의 여왕 경호(?) 장면을 어떻게 써먹지 않을까 싶었는데 안했더군요. ^^
anywhom 님 / 그 장면은 정말 대박 웃었습니다. 진짜 올드 팬 아니라면 의미도 잘 모를 듯? 푸하하~
두드리자 님 / 그 한 사람이 좌우하는 부분이 얼마만큼인지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잘되든 못되든 책임지는 자리인건 맞습니다. ^^
명언입니다. 앞으로 날아올라 무엇을 할지가 문제지만...
역시 앞으로 무얼 할지가 관건이겠죠. 구태여 직전의 무엇을 되새기지 않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