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그림 구경을 빙자한 로마노프 왕조 연대기, 그 하편입니다.
앞서 포스팅한 상편을 먼저 보시면 재미..는 어차피 없겠지만 이해에는 쪼금 도움이 될지도?

처음에는 왕조가 수집한 예술품들을 겨울 궁전의 별관에 숨겨놓는 전시하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어느새 본관 전체로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넘쳐흐른 나머지 2013년부터는 궁전 광장 건너편의
구 참모본부 건물을 신관으로 편입하여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신관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궁전과 광장, 원주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더라구요.
많은 사람들이 본관에서 이미 지쳐버려 신관까지 엄두를 내지 못하는지 관람 인원도 적은 편이고
어디서나 인기있는 인상파 회화를 비롯한 근대 이후의 작품들은 이쪽에 있으므로 참고하세요. ^^


신관의 초입부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조르주 베커(Georges Becker)와 라우리츠 툭센
(Laurits Tuxen)이 각각 그린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장면입니다.
러시아 제국과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두 황제 이다보니 미술관에도 근대 화가들이 묘사한
비교적 자연스러운 장면들이 왕왕 있는데...

Andrey Filippovich Mitrokhin, "Portrait of Paul I of Russia", The State Hermitage Museum
일단은 먼저 하던 이야기부터 이어나가야겠죠?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한 뒤 그 아들이 황위에 올라 파벨 1세(Павел I Петрович, 1754~1801)
가 됩니다. 파벨 1세는 아버지 표트르 3세를 많이 닮았는데 아버지가 워낙 독보적인 클라스다보니
작은 체구와 못생긴 외모는 물론 약간의 정서적 문제와 프로이센 덕질같은걸 닮아 문제가 되었죠.
예카테리나 치세에 반란 분자들이 명목상 그를 내세운 것도 있어서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그녀의 정책들을 모두 뒤집고, 제위계승법을 통해 이후 여제가 나오지 못하도록 못박아 버립니다.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아니면 무언가 강한 의지가 있었는지 선제 시절 강화되었던
농노제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 끝에 암살당하는 것까지 아버지와 닮아버린;;
그리고 이 시기 서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지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두하고 있었으니...

George Dawe, "Portrait of Emperor Alexander I", Peterhof Palace
이 뒤로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드르들과 니콜라이들의 시대가 됩니다.
또 이때부터 러시아 황제들이 모두 장신인데다 황가에서 미남미녀가 많이 나오게 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면 영 아닌 것이, 황후쪽 피가 강한 건지 아니면 친아버지가... 읍읍!!
하여간 아버지의 암살 뒤 제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1세(Александр I Павлович, 1777~1825)는
어린 시절 계몽 군주를 표방했던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자유주의자로 교육받았기에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집권한 나폴레옹과 어느정도 상호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Peter von Hess, "Battle of Borodino", The State Hermitage Museum
그러나 유럽 전역을 빨아들이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러시아를 피해갈 리는 없었고, 우연적이며
필연적인 몇 가지 이유가 얽혀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일으킵니다. 일찍이 없던 초대규모
병력의 침공 앞에 알렉산드르 1세는 군사적 소양이 사실상 전무함에도 전선의 전술에 사사건건
개입하여 러시아군의 연전연패에 여러모로 기여하였으나 끝까지 항전한다는 의지만은 굳건했고,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전투에서는 밀리지 않았을지라도 러시아의 광대한 토지와 극심한 추위
그리고 제 몸을 갉아먹는 시간 앞에서 결국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죠. 이 원정의 기록적인 실패는
결국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몰락을 앞당기는 한편 러시아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사실상 끝장나며 나폴레옹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이 세워진
빈 체제에서 러시아와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의 해방자'로 일컬어지며 열렬한 환대를 받습니다.
군사적 능력이야 어찌됐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라의 지도자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덕분에 수많은 영웅들로 장식된 모스크바 크렘린 궁의 붉은 성벽 앞에 그의 동상도 세워지고...
그러나 그 개인적으로는 젊어서 따르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스스로 깨부수는 모순되는 처지에
있었고 전쟁 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극히 보수적인 군주가 되면서 한편 미신에 빠져드는 등
영웅으로 떠받들여진 겉모습과 달리 불행한 삶을 산 끝에 크림 반도에서 요양 중 사망합니다.

Franz Krüger, "Portrait of Emperor Nicholas I", The State Hermitage Museum
알렉산드르 1세에게는 아들 없이 딸만 있었던데다 이전 파벨 1세가 제위계승법을 확립하면서
여성의 황위 계승을 금지하였으므로 그의 막내 동생인 니콜라이 1세(Николай I Павлович,
1796~1855)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합니다. 사실 나폴레옹 전쟁에서 군무를 총괄했던 둘째 동생
콘스탄틴 대공이 오랫동안 황태자로 있었지만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잃었기에, 신황제 즉위
후 전쟁에서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이 대공의 옹립을 내세우며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일으켰고
니콜라이는 이를 진압하면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철저한 반동 군주가 되었습니다.

Baykov Fedor Ilyich, "Battle of Kuryuk-Dara in the vicinity of the Kars fortress on July 24, 1854", Military Historical Museum of Artillery, Saint Petersburg
표면적으로는 니콜라이 1세의 치세가 러시아 제국의 최전성기였다고 생각되는군요.
강대한 군사력과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명예가 더해져 유럽 전체에서 막강한 발언력을 가졌으며
스스로 유럽의 헌병을 자처하여 크고작은 분쟁에 개입하면서 자유주의의 확산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라는 강대한 적이 사라진 입장에서 러시아의 개입과 억압이 부담으로 다가오자
잘나가는 놈은 일단 다구리하고 본다는 유럽의 유구한 전통(...)에 따라 크림 전쟁이 발발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이었으나 사실상 러시아와 다른 유럽 주요국들의
대리전이었던 이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화려한 겉모습에 감춰졌던 후진적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며
참패했고, 근근히 버텨왔던 러시아의 몰락은 더이상 막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대형 동상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모이카 강변, 성 이사악 대성당 앞에 있습니다.
대성당 뒤에 공원과 앞서 포스팅에서 소개했던 브론즈 호스맨(표트르 대제 동상)이 있으므로
사실상 표트르 1세의 뒤를 따르고 있는 모양새인데, 기마상의 닮은 모습까지 더해 니콜라이 1세가
대제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다고 여기고 싶었던, 또는 주장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실은 시궁창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황제는 전쟁의 말미에 실의에 빠져 폐렴으로 사망합니다.

Egor Botman, "Portrait of Emperor Alexander II", The State Hermitage Museum
니콜라이 1세 사후 그의 적장자인 알렉산드르 2세(Александр II Николаевич, 1818~1881)가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는 선황 치세 말년의 전쟁을 겪으며 낙후된 러시아의 실상을 뼈저리게
느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깨닫고 있었죠.
알렉산드르 2세는 무려 19세기 중반까지(...) 유지되고 있던 농노를 철폐하는 해방령을 필두로
행정, 재정, 사법, 교육, 군제 등 다방면의 개혁과 함께 초기 수준에 머물러있던 산업화도 국가의
주도 아래 적극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위적이고 급속한 개혁은 분명 일정 성과도 거두었으나
시행 과정에서 엄청난 혼란 또한 야기되었고, 기득권층의 반대도 극심했으며, 불충분하다고 여긴
지식인들은 직접 혁명 운동에 뛰어들게 되니...

인민주의 혁명가들은 조직화되어 정부 요인을 암살하는 테러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본격적인 혁명의 시발점으로 전제정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황제 암살을 시도했죠.
그러나 그들이 영 어설펐는지 아니면 황제가 기막힌 운을 타고났는지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고
목숨에 위협을 느낀 황제가 점차 보수적으로 회귀하면서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져드는 가운데
1881년 3월, 입헌군주국으로 가는 토대가 될 새로운 헌법에 서명한 직후 기병학교 열병식에
참석하러 가던 알렉산드르 2세는 폭탄 테러를 받아 치명상을 입고 겨울 궁전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합니다. 그의 아들이자 다음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는 그가 테러로 피를 흘린 자리에
피의 구원 성당을 세우며 복수를 다짐하는데...

러시아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노력했던 사실상 마지막 황제의 비극적인 죽음은
황가는 물론 테러를 꾀한 인민주의자들에게도 러시아 국민 전체에게도 크나큰 불행이 되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구체제의 상징인 황제가 죽으면 인민들이 일어나 혁명을 일으킬 거라 믿었지만
정작 인민들은 테러의 잔혹함에 눈을 돌렸고, 보수 귀족들은 테러리즘의 근절을 외치며 더욱
굳건하게 반동화된 것이죠. 그 중심인 알렉산드르 3세는 부황의 동상을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옆에 성대하게 마련하였으나 혁명 시기 파괴되었다가 2006년 복원되었습니다.

Valentin Serov, "Alexander III in Danish Royal Life Guards Uniform", State Tretyakov Gallery
알렉산드르 3세(Александр III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45~1894)는 사실 준비된 황제가
아니었습니다. 남겨진 그림과 사진들에서 보듯 거구에 솔직하며 정치(와 거짓말)엔 소질이 없는
천상 군인 타입이었고, 총명하고 능력도 출중한 형 니콜라이가 황제가 되리라는 것을 그는 물론
러시아 전체가 믿어 의심하지 않았죠. 그러나 불의의 사고와 합병증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그는 황위를 이어받아야만 했고 이는 위태로운 러시아를 파멸로 몰아가는 단초가 됩니다.

Ilya Repin, "Aleksander III receiving rural district elders in the yard of Petrovsky Palace in Moscow", State Tretyakov Gallery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그는 엄청난 거구에 힘이 장사였음에도 본디
따뜻한 사람이어서 황가 안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자 다정한 아버지였고 러시아 국민들에게도
자애로운 국왕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단순하고 외곬수적인 면모는
부황의 죽음에 관련해서는 극단적으로 작용하여 진보적인 세력이라면 타협 없이 강력 탄압했고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농노 해방을 제외한 거의 모든 개혁 조치들을 철회하는 등 더없이 강경한
반동 군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겨울 궁전의 동쪽, 마르스 광장 윗편의 대리석 궁전(Marble Palace)의 안뜰에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이 놓여져 있습니다. 같은 기마상인데도 표트르 대제나 니콜라이 1세의 그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른 것이, 가만히 서있는데도 존재감이 엄청나달까, 그가 좀 더 이른 시기에 태어나 황제가 아닌
왕자이자 장군으로 봉직했더라면 과연 어떠했을까 상상해보게 됩니다.

Valentin Serov, "Portrait of His Imperial Majesty Nicolai II Alexandrvitch, Tsar of All the Russias", Scottish National Gallery
드디어 마지막 차례가 돌아왔군요. 누구나 아실 그 이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 Александрович, 1968~1918)입니다.

Ilya Repin, "Ceremonial sitting of the state council on 7 may 1901", The Russian Museum
나중에 포스팅할지도 모르겠지만, 에르미타주에 가려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또 하나의 미술관인
국립 러시아 미술관에서는 커다란 방 하나를 통째로 할애하여 높이 4미터, 폭 9미터에 육박하는
일리야 레핀의 이 거대한 그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국무 회의를 그렸다고는 하나 사실상 참석한
각료들의 초상화를 이어붙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그림 속 인물들 중 과연 17년 뒤 자신의 운명을
희미하게라도 예상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지...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한 켠에는 니콜라스 2세의 서재가 복원되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니콜라스 2세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불행이 더욱 증폭된 것만 같은 성격과 인생이었는데,
독실한 정교회 신자에다 교양이 깊고 인품이 선량하며 예의바른 신사이자 다정한 아버지였지만
만 26세에 즉위했음에도 자신의 건강을 과신했던 부황 덕분에 제왕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그것이 유약하면서 독선적인 성격과 겹쳐 전례없이 무능한 황제, 최악의 치세를 만들었습니다.

Wojciech Horacy Kossak, "Bloody Sunday in Petersburg (9th of January 1905)", Kirovograd Regional Art Museum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인 러시아 내부의 개혁은 등한시한 채 영토 확장에만 관심을 둔 결과
다른 나라들과 충돌을 야기하며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에서 엄청난 전비를 허비했고
황후 알렉산드라와 그녀가 총애한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국정을 휘둘리며 급속도로
민심을 잃었으며, 결정적으로 1905년 초 황제에게 노동 여건 개선을 청원하고자 황궁 앞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군대가 발포하여 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면서
러시아 국민은 황제를 적대시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는 물론 러시아 전역에 니콜라이 2세의 동상이나 기념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생각했는데, 작년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했을 때 포크롭키 성당 앞뜰에서 자그마한(?)
흉상을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군요. 아닌게아니라 세월이 지나면서 황제에 대한 동정표도 꽤
일었는지 2001년에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2008년에는 대법원을 통해 정치적
으로도 복권되었다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불쌍한 사람인건 이해하지만 그 무능이 불러일으켰던
수많은 피와 엄청난 사태들을 생각하면 시성과 복권은 좀;; 하긴 이나라 조선에도 무능과 실정에도
불구하고 동정론과 미디어를 통해 띄워진 고종 및 왕후 민씨가 있으니 남말 할 처지는 아닌가요.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네바 강을 끼고 마주보는 페트로파블롭스키 요새의 성당에는 표트르 1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표트르 2세와 이반 6세를 제외한 모든 황제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사진의 오른쪽 아래, 특별히 흉상과 기념 메달까지 올려진 것이 표트르 대제(1세)의 석관이죠.

미술관 건물, 겨울 궁전 별관의 동쪽 끝으로 돌아가면 여러 거인들이 천장을 받치고 서 있는
커다란 현관을 만나게 됩니다. 1920년대까지는 이곳을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입구로 사용했다네요.
멸망한 왕조의 흔적을 돌아보고 나온 저녁 무렵이라 그런가 거인들의 등에서 왠지 모를 애잔함이~
여기까지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그 주변을 통해 돌아본 로마노프 왕조의 뜬금없는 연대기였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여행은 이제 시작입니다. 쿨럭~
백야와 좀비의 헬싱키
스베아보리, 비아포리, 그리고 수오멘린나
이것이 북유럽 감성!? 알바르 알토
에르미타주의 로마노프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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