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중 하나이자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블랙 코미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부제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은
살짝 바꾸거나 비틀기만 하면 여기저기에 다 어울리는, 과연 써먹기 좋은 명문이 확실하군요.
누차 강조하다시피 저는 마블보다는 DC파, 특히 명백한 배트맨빠임을 공언함에도 불구하고
작년 "인피니티 워" 개봉 당시 캡틴 아메리카 3부작 블루레이 세트를 엉겁결에 질러오더니
이번 "엔드게임" 개봉을 맞아 염가에 풀린 아이언맨 3부작 세트도 결국 지르고야 말았습니다.

그게 어느덧 11년이 지났군요. 2008년 이맘때 극장에서 느꼈던 그 쾌감을 기억합니다.
2002년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에서 최신 CGI의 힘을 빌어 표현했던 공중 활공도 대단했지만
공돌이의 로망이 차고 넘쳐 스스로 하늘을 날고 배트맨급 돈지랄까지 펼치는 "아이언맨"의 매력,
특히 어떠한 상황에서도 10초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 '쿨'함이 끼얹는 상쾌함이란!?
마지막 대사 'I am Iron Man'으로 대변되는 그 감성은 아시다시피 기록적인 성공을 가져왔고
그 성공을 바탕으로 이후 22편의 영화를 통해 구축되는 '인피니티 사가'의 시금석이 되었으며
또한 시리즈 직계 후속작들에게는 넘어야할 산이자 극복해야할 과정이 되었습니다.
"아이언맨 2"에서 불거진, 어쩌면 "아이언맨 3"까지도 이어지는 크고작은 문제점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 혹은 변명꺼리가 있겠지만 아마도 저를 비롯하여 취향이 비슷한 일부 관객들이
느꼈을 가장 큰 요인은 1편의 최대 강점이었던 상쾌함과 쿨함이 많이 엷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쌉싸름하고 탄산 가득한 청량 음료인줄 알고 주문했는데 설탕 없는 블랙 커피가 나온 격이었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 요인들이 기존의 히어로들과 구분되는 가장 큰 차별화 요소이긴 했으되
표면적이고 말초적인 것들이라 후속에서도 고민없이 계속 유지하기엔 동어 반복이 되기 쉬웠고
(아예 B급 노선으로 밀고나간 데드풀은 예외. 그랬음에도 2편은 1편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래서인지 아이언맨 시리즈는 뒤로 갈수록 점차 정석적인 히어로물에 가깝게 변화되면서
토니 스타크는 처음부터 이상이 확고했던 캡틴 아메리카와 달리 (토르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이례적으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성장하는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이언맨의 솔로 작품들은 빌런의 취급이 좋지 못하다는 단점이 생기기도 했군요.
2편의 위플래시는 인상적인 등장 이후 줄곧 내리막인데다 3편의 만다린은 그냥 대놓고 페이크;;
토니 스타크 내면의 성장에 중점을 둔 나머지 빌런은 그 내면을 자극하는 장치에 머물러버렸다는
쓴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는 수준이긴 한데, 그래도 그런 희생(?)을 통해 인간적으로 성장하고
어벤져스의 사건들이나 캡틴 아메리카와의 대립을 거치면서 시행착오와 실패까지 경험한 뒤에
"엔드게임"의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한 번 'I am Iron Man'이라는 같은 대사를 말하는 장면은
그 아이언맨이 과거 1편의 아이언맨과는 전혀 다른 인물임을 관객들에게 어필함과 동시에
과연 인피니티 사가의 진정한 주인공이며 또한 진정한 히어로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죠.
11년간 독자 타이틀 영화 세 편, 어벤져스 시리즈 네 편, 조연으로도 기타 여러 편에 출연하면서
캐릭터의 탄생과 성장, 퇴장을 이토록 설득력있게 그려내다니,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건만
그 말도 안되는걸 성공시킨 MCU와 케빈 파이기 외 여러 주조연 배우들과 스태프들이었습니다.
수고했어요 토니 스타크, 수고했어요 로다주.
미국의 이상과 현실
덧글
11년간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한 줄로 요약해봤습니다.
11년간의 아이언맨을 한 줄로 요약해봤습니다. X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