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의 산

마추 픽추도 다녀오고 비니쿤카도 다녀왔으니 이제 여행의 근거지이자 잉카의 수도였던
황금의 도시 쿠스코를이제서야 돌아보기로 합니다.

쿠스코(Cuzco 또는 Cusco, 케 Qusqu)라는 이름은 왕왕 '배꼽'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것은 과거 잉카 사람들이 쿠스코를 세상의 중심(배꼽)으로 여겼다는게 잘못 전해진 것이고
케추아어, 아니 아이마라어의 기원은 도시 신화에 나오는 'qusqu wanka(올빼미의 바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잉카 이전 킬케(Killke) 문명의 도시가 10~12세기 무렵까지 존속되었고
13세기 잉카의 영향권에 들어간 이후 스페인에게 점령되기까지 제국 수도의 영광을 누렸죠.
남미의 여느 고지대 도시들처럼 고원 지대로 둘러싸인 분지에 건설되었기에 도시의 확장이
골짜기를 따라 진행되다보니 지금은 동서로 길쭉한 모양이 되었습니다.

시는 해발 3,400 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므로 고산 지대가 처음이라면 미리 준비하는게 좋겠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오고 맥박이 올라가며 약간 어지러운, 가벼운 숙취에 가까운 느낌??
엄.. 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술 안먹고도 헤롱헤롱한 기분이니 오히려 좋을... 리는 없겠지???
인구는 2017년 기준으로 43만 명이 조금 못되지만 연간 방문하는 관광객이 2백만 명쯤 됩니다.
거기에 저도 머릿수 하나 보탠 셈이네요.

관광객들이 주로 머무르는 역사 지구(Centro Histórico)의 경우 시가지의 역사가 깊다보니
좁은 골목과 같은 길들과 돌로 포장된 바닥 등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콕 집어 말하자면 스페인의 구 수도이자 요새 도시인 톨레도(Toledo)와 매우 닮은 인상이죠.
호텔들이 밀집한 넓은 도로가 이 정도이고 대부분의 골목은 차 한대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여서
오가는 자동차들의 대부분은 소형차 내지 경차들입니다. 이렇게 출근 시간이면 아주 난리;;;
지금은 매끈한 기아 차들이 많지만 왕년에는 중고로 넘어온 티코가 그렇게 많았다는데,
그 티코들은 이제 지방으로 돌려져 먼저 들린 이카(나스카)에서 정말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별별 마개조를 한 골때리는 티코(혹은 스즈키 알토)들이 많았구만 사진찍을 틈이 없었..ㅠㅠ

이제 역사 지구를 중심으로 쿠스코 시내를 돌아보기로 합니다.
스페인의 여느 도시들처럼 시가지의 중심에는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이 있습니다.
잉카 시대부터 이어져온 광장이라지만 광경은 물론 많이 바뀌었겠죠.

광장 중앙의 분수대 위에 서있는 상은 9대 황제인 파차쿠티(Pachacuti Inca Yupanqui).
마추 픽추를 찾아갈 때 무척 많이 언급되었던 이름이죠? 사실상 도시 국가의 하나였던 잉카를
정복 전쟁을 통해 끌어올려 우리가 알고있는 '잉카 제국'의 형태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게임 문명 시리즈에서도 잉카의 지도자로 나온다는데 제가 해보질 않아서 그쪽은 잘 모르겠고,
어쨌거나 잉카 역사에서의 위치는 우리나라 조선의 태종 + 세종 쯤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파차쿠티는 확장된 영토를 네 지방(친차수유, 쿤티수유, 코야수유, 안티수유)으로 나누고
확립된 자신의 제국을 네 개의 땅이라는 뜻의 타완틴수유(Tawantinsuyu)라 칭했습니다.
스페인을 통해 알려진 '잉카'는 사실 귀족 계급(황제는 '사파 잉카')을 뜻하는 말이었죠.

광장 동쪽에는 잉카의 창조신 위라코차(Huiracocha)의 사원 키스와르칸차(Kiswarkancha)
를 허물고 세워진 쿠스코 대성당(Catedral del Cuzco)가 있고...

광장 남쪽에는 파차쿠티의 손자이자 잉카 전성기를 통치했던 우아이나 카팍(Huayna Capac)
의 궁전을 허물고 세워진 예수회 성당(Iglesia de la Compañía de Jesús)이 있습니다.
이 성당들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을 해야겠군요.

광장 뒤로 언덕 위까지 빼곡하게 집들이 들어차있는걸 보면 아 여기가 남미로구나~ 싶죠.

광장에서 태양 거리(Av El Sol)를 따라 500 미터쯤 내려오면 도로변에 너른 풀밭이 있는데

그 뒤로 우뚝 서있는 건물은 산토 도밍고 성당(Convento de Santo Domingo) 입니다.

그런데 성당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 뭔가 좀 심상치 않죠?
윗쪽 성당 본 건물의 전형적인 유럽식 벽돌 축조와 달리 벽돌이라기보다 큰 덩어리의 돌에다
금을 그어놓은 듯 빈 틈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이것은 잉카 시대의 건축물입니다.
철기 도구를 제조할 수 없었던 잉카는 돌의 갈라진 틈에 쐐기를 박아넣고 물과 불을 통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여 쪼갠 뒤 벽돌이 들어갈 자리에 딱 맞도록 모래로 연마함으로써
벽돌 사이에 접착제(모르타르)가 필요없는, 벽돌만으로 이루어지는 건축을 추구했습니다.
즉 어느정도 규격화된 벽돌을 요령껏 쌓는게 아니라 벽돌 하나하나가 전부 맞춤 제작인 거죠.
그러니 당연하게도 이런 건축물을 만드는 데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동력, 자금이 요구되었고
그를 통해 만들어진 칼같은 결과물은 만든 이(주로 황제)의 권력과 재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물론 서민들까지 이런 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으므로 건물의 주인이나 용도에 따라 건축물의
완성도가 달라지는건 마추 픽추에서 이미 보아온 바이나, 역시 수도의 것은 확실히 다르네요.
그 중에서도 태양의 신 인티에게 바쳐진 코리칸차(Coricancha, 케추아어로 황금의 사원)에는
그 중요성과 상징성으로 미루어 당시 가능한 최고의 기술과 노력을 쏟아부었음이 확실합니다.
벽돌을 쌓아 만들었지만 석재들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커다란 바위처럼 조직된 코리칸차는
1650년과 1950년의 큰 지진에서 위에 지어진 산토 도밍고 성당의 일부분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별다른 피해 없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피사로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황금의 사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원의 곳곳은, 심지어 외벽 위까지도, 다량의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잉카의 많은 건물들이 파괴된 뒤 새 건물이 세워지거나 잔해가 되어 세월 속에 흩어지는 동안
코리칸차는 산토 도밍고 성당 및 수도원의 토대 및 중정이 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방과 벽들을 보면... 너무나 매끈한 나머지 나무 합판에 그린 그림이 아닐까
싶을 정도죠. 건물 모형을 이렇게 만들면 현실성이 없다고, 무성의하다고 욕을 먹을텐데~

이 방도 원래는 이렇게 황금으로 덮이다시피 했을 걸로 추측됩니다.
스페인 세력과 처음 조우하여 해프닝 끝에 사로잡혀버린 13대 황제 아타우알파(Atahualpa)가
해방을 위한 몸값으로 자신이 잡혀있던 방을 모두 채울 만큼의 엄청난 황금을 제안했을 때
그 황금의 대부분은 코리칸차에서 수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사로는 그걸 모두 녹여버렸죠.

코리칸차는 또한 하늘의 별을 보며 점을 치는 천문 관측의 장소이기도 했는데
내부 한 켠에는 당시 잉카 사람들이 보았던 밤하늘의 은하수를 나타낸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밝은 별들을 이어 별자리로 만들었던 서구와는 반대로 은하수 속의 어두운 부분을 사람이나
동물로 보았다는게 재미있네요. 이 때는 이걸 그냥 가볍게 보았구만... 며칠 뒤 그럴 줄은..;;

파차쿠티, 투팍 잉카 유판키, 우아이나 카팍 3대에 100년이 채 안되는 전성기가 끝나자마자
황위 계승을 놓고 다툰 내전과 스페인의 침략이 겹쳐 잉카 제국은 순식간에 몰락하였습니다.
아타우알파의 처형 이후 괴뢰 황제로 세워진 망코 잉카 유판키(Manco Inca Yupanqui)가
쿠스코를 탈출하면서 입장을 뒤집어 스페인에 대한 결사 항전을 외치게 되는데~

망코 잉카 유판키의 이야기는 조금 뒤에 다시 이어가기로 하고,
쿠스코 시내에는 지금도 잉카 시대의 돌담이나 도로가 남아 그대로 사용하는 곳이 많습니다.

한 골목에는 잉카의 변태(...)에 가까운 돌 끼워맞추기를 보여주기로 유명한 12각 돌이 있죠.
저렇게 톱니처럼 물려놨으니 어지간한 지진이 닥친들 꿈쩍할 리가. -,.-

자 이제 쿠스코 북쪽으로 올라가보기로 합니다.

계단과 경사로를 따라 계속 계속 올라갑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도 숙박 시설이 많네요. 사이사이 차 한대 지나는 골목도 섞여 완전히 미로~

주거 지역을 모두 통과하여 산 크리스토발 광장(Plaza San Cristobal)에 이르렀습니다.
기념품을 파는 저 원주민 아주머니(할머니?)는 간이 베틀(?)로 직접 천을 짜고 계시더란;;;;
여기도 충분히 전망이 좋지만 우리는 더 올라가야 합니다.

여기가 해발 3,700 미터였던가, 쿠스코에 도착한 첫날을 생각하면 결코 쉬운 높이는 아니구만
그래도 며칠동안 적응하고 비니쿤카에서 5천 미터도 찍고오고 해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게...

목적지인 삭사이와망에 도착했습니다.
쿠스코에서 왕왕 보이는, 사진에서처럼 색동 실로 치장한 라마나 알파카를 데리고있는 사람은
촬영 행상(?)을 하는 분들입니다. 같이 사진 찍으면 돈을 내야 하죠. ^^
화물 운반과 고기를 위한 라마와 털을 얻기위해 기르는 알파카는 모두 낙타의 친척 뻘인데
상대적으로 덩치가 크고 낙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털이 억세보이면 라마,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고 머리와 얼굴까지 북실북실한 털에 덮여있으면 알파카로 보면 됩니다.

쿠스코의 북쪽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이자 사원인 삭사이와망(Sacsayhuamán)은
케추아어로 만족한(배부른?) 매, 혹은 매의 둥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잉카의 전설에는 투팍 잉카 대에 퓨마의 모양을 본뜬 쿠스코의 머리로 지었다고 전해오지만
고고학적 조사 결과 인간이 손댄 흔적은 기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지금 남아있는 부분도
11세기 킬케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13세기 잉카가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는군요.

쿠스코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아 스페인 쫌~

수도에 인접한 대형 성채라는 점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남한산성과 비슷할 수도 있겠네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서쪽 끝에는 무유크마르카(Muyucmarca)라는 거대한 탑의 기단만이 남아있습니다.
삭사이와망에는 신전과 세 개의 탑이 있었다지만 모두 파괴되어 현존하는 것은 없습니다.

앞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스페인 세력에 온갖 굴욕을 당하다 쿠스코를 탈출한 망코 잉카는
단시간 내에 최대 2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소집하고 쿠스코를 포위하기 시작합니다.
포위망의 핵심은 당연히 이 삭사이와망이었으나 이곳이 중요하기는 스페인도 마찬가지였으니
결국 이곳을 두고 양측이 정면으로 격돌하게 되었죠. 처절한 전투 끝에 수많은 잉카인들의
시신을 남기고 요새는 결국 넘어갔으며 쿠스코를 둘러싼 전쟁은 장기전으로 변화합니다.
일단 정상에서 패닝 한 바퀴 돌리고~

지리적 위치상 쿠스코를 향한 남쪽은 절벽이므로 성채로서의 벽은 북쪽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스페인 세력에게 점령된 후 파괴되어 이렇게 보면 을씨년스러운 폐허같지만...

이 돌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거죠. 저 뒤에 사람과 옆의 돌을 비교해보면 크기가 대충?

완전히 스페인의 식민지로 떨어진 뒤 삭사이와망의 건물과 탑, 벽 등의 건축물은 해체되어
쿠스코에 세운 새로운 성당과 건물들의 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채의 기반을 이루었던, 너무 크고 무거워서 차마 옮기지 못한 거석들만이 지금까지 남았죠.

맞은편의 바위 언덕에 오르면 톱니같은 돌기 구조가 3층으로 쌓인 성벽이 잘 보입니다.
이런 지리적 잇점과 수십 배 이상의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고작 수 백의 콩키스타도르에게
패퇴한걸 보면 당시 양쪽 세력 병장기의 격차는 대체 얼마나 컸던 것인지..;;
쿠스코를 포위하고 대치한지 10개월, 망코 잉카는 갈수록 불리하게 전개되는 전황 속에
승산이 없다 판단하고 군대를 해산한 뒤 안데스 산맥 깊숙한 빌카밤바(Vilcabamba)로 이주,
(왕왕 에콰도르의 동명지로 오인되지만,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150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
네오 잉카를 세우지만 1572년 손자인 투팍 아마루(Túpac Amaru)가 스페인에 체포 처형되면서
잉카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눈을 왼쪽으로 돌리니 아까 걸어올라온 요새의 동쪽 끝 옆으로 언덕이 하나 있고...

그 위에는 크고 하얀 예수의 상이 서있습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상도 있지만 남미의 여느 도시들은 이런걸 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듯하더군요. 당신의 이름 아래 뿌려진 수많은 피들을 대체 어떻게 보셨을런지.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흘러 이젠 남미 출신의 교황을 맞게 되었으니 역사의 순환이란 참~

예수상의 앞에서 내려다본 쿠스코 시내. 아르마스 광장과 두 성당이 잘 보이네요.

이제 다시 내려갑니다. 올라갈 때는 구불구불해서 몰랐구만 빠른 길로 가로질러 왔더니
정말 가파른 계단을 끝도 없이 내려왔..;;

여기가 무슨 성당이었더라 기억이 안나네요. 작은 성당인데 별다른 건 아니고...

옆에 세워진 성모자상이 원주민을 본뜬 모습이라 인상적이었거든요.
국내의 성당들을 돌아다니면서 한국적인 모습을 표현한걸 많이 보았기에 더욱 반갑습니다.

여기는 잉카 박물관...이었으나 시간 관계상 들어가보지 못하고 패스. ㅠㅠ

잉카의 보물들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나 싶어 봤더니 귀금속 공예품 판매점. -ㅁ-

파차쿠티의 궁전터인 쿠시칸차(Cusicancha)는 유리벽을 둘러치고 공사중인 듯?

산 프란시스코 광장(Plaza San Francisco)을 지날 즈음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산 페드로 시장(Mercado Central de San Pedro)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현지인보다는 관광객 상대이긴 하지만 기념품부터 먹거리까지 어지간한건 다 있더라구요.
같은 물건이라도 리마보다는 훨씬 저렴하니 구입할 게 있다면 이쪽에서 찾아보는게~

잔돈이 안되어 즉석에서 갈아주는 과일 주스를 한 잔만 시켰는데 두 잔을 줍니다.
얼마 안 되는 동전이라도 마저 건넸더니 한사코 받지 않던.
여기 뿐만이 아니고, 이번 여행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십중팔구 무척 친절한 편이었네요.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최대한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기색이 역력했거든요.

쿠스코에서 먹은 현지식이라면... 먼저 치차론(Chicharrón).
쉽게 말해 돼지고기(물론 다른 고기도 가능) 튀김인데, 물론 튀겨서 맛없는건 없지요!
다만 간이 좀 강했는지 먹으면서 잉카 콜라를 엄청 들이켰던~

다음으로 먹었던건 로모 살타도(Lomo Saltado) 입니다.
쇠고기(등심)와 감자, 양파, 토마토 등등을 양념에 넣고 볶은 요리인데, 꽤나 맛이 좋지요~
물론 여기서도 잉카 콜라는 필수! 정말 페루에 있는 동안 물보다 잉카 콜라를 더 마신 듯?

페루의 술이라면 단연 피스코(Pisco)가 가장 유명합니다.
이카 지방을 오갈때 스쳐지났던 피스코 시(파라카스 바로 위)가 주산지였기에 붙은 이름으로
일단은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인데 처음 만들 때 오크통 대신 원주민의 항아리를 사용했기에
통의 향이나 색이 배어들지 않아 무색 무취...는 아니구나, 종류에 따라 포도향이 나긴 합니다.
주로 과즙과 설탕, 계란 흰자 등을 섞어 피스코 사워라는 칵테일로 만들어 먹는데
맛이 아주 좋더라구요. 게다가 만든 사람이 피스코를 듬뿍 넣었는지 한 잔에 취해버렸~~

마시고 나오다 벽에 재미있는 그림이 있길래 찍었습니다.
킹(마이클 잭슨) - 퀸(프레디 머큐리) - 잭(프린스) 이라니, 센스가 좋네요.

이렇게 마지막 밤이 오고, 페루 여행도 이렇게 끝났습니다.
끝났다구요.
...에에이, 또 이어집니닷!!
저 많은 낙서는 누가 그렸을까
사막에서 모래 장난을
세상 끝의 지배자
공중 도시를 찾아서
늙은 봉우리
무지개의 산

마추 픽추도 다녀오고 비니쿤카도 다녀왔으니 이제 여행의 근거지이자 잉카의 수도였던
황금의 도시 쿠스코를

쿠스코(Cuzco 또는 Cusco, 케 Qusqu)라는 이름은 왕왕 '배꼽'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것은 과거 잉카 사람들이 쿠스코를 세상의 중심(배꼽)으로 여겼다는게 잘못 전해진 것이고
케추아어, 아니 아이마라어의 기원은 도시 신화에 나오는 'qusqu wanka(올빼미의 바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잉카 이전 킬케(Killke) 문명의 도시가 10~12세기 무렵까지 존속되었고
13세기 잉카의 영향권에 들어간 이후 스페인에게 점령되기까지 제국 수도의 영광을 누렸죠.
남미의 여느 고지대 도시들처럼 고원 지대로 둘러싸인 분지에 건설되었기에 도시의 확장이
골짜기를 따라 진행되다보니 지금은 동서로 길쭉한 모양이 되었습니다.

시는 해발 3,400 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므로 고산 지대가 처음이라면 미리 준비하는게 좋겠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오고 맥박이 올라가며 약간 어지러운, 가벼운 숙취에 가까운 느낌??
엄.. 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술 안먹고도 헤롱헤롱한 기분이니 오히려 좋을... 리는 없겠지???
인구는 2017년 기준으로 43만 명이 조금 못되지만 연간 방문하는 관광객이 2백만 명쯤 됩니다.
거기에 저도 머릿수 하나 보탠 셈이네요.

관광객들이 주로 머무르는 역사 지구(Centro Histórico)의 경우 시가지의 역사가 깊다보니
좁은 골목과 같은 길들과 돌로 포장된 바닥 등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콕 집어 말하자면 스페인의 구 수도이자 요새 도시인 톨레도(Toledo)와 매우 닮은 인상이죠.
호텔들이 밀집한 넓은 도로가 이 정도이고 대부분의 골목은 차 한대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여서
오가는 자동차들의 대부분은 소형차 내지 경차들입니다. 이렇게 출근 시간이면 아주 난리;;;
지금은 매끈한 기아 차들이 많지만 왕년에는 중고로 넘어온 티코가 그렇게 많았다는데,
그 티코들은 이제 지방으로 돌려져 먼저 들린 이카(나스카)에서 정말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별별 마개조를 한 골때리는 티코(혹은 스즈키 알토)들이 많았구만 사진찍을 틈이 없었..ㅠㅠ

이제 역사 지구를 중심으로 쿠스코 시내를 돌아보기로 합니다.
스페인의 여느 도시들처럼 시가지의 중심에는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이 있습니다.
잉카 시대부터 이어져온 광장이라지만 광경은 물론 많이 바뀌었겠죠.

광장 중앙의 분수대 위에 서있는 상은 9대 황제인 파차쿠티(Pachacuti Inca Yupanqui).
마추 픽추를 찾아갈 때 무척 많이 언급되었던 이름이죠? 사실상 도시 국가의 하나였던 잉카를
정복 전쟁을 통해 끌어올려 우리가 알고있는 '잉카 제국'의 형태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게임 문명 시리즈에서도 잉카의 지도자로 나온다는데 제가 해보질 않아서 그쪽은 잘 모르겠고,
어쨌거나 잉카 역사에서의 위치는 우리나라 조선의 태종 + 세종 쯤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파차쿠티는 확장된 영토를 네 지방(친차수유, 쿤티수유, 코야수유, 안티수유)으로 나누고
확립된 자신의 제국을 네 개의 땅이라는 뜻의 타완틴수유(Tawantinsuyu)라 칭했습니다.
스페인을 통해 알려진 '잉카'는 사실 귀족 계급(황제는 '사파 잉카')을 뜻하는 말이었죠.

광장 동쪽에는 잉카의 창조신 위라코차(Huiracocha)의 사원 키스와르칸차(Kiswarkancha)
를 허물고 세워진 쿠스코 대성당(Catedral del Cuzco)가 있고...

광장 남쪽에는 파차쿠티의 손자이자 잉카 전성기를 통치했던 우아이나 카팍(Huayna Capac)
의 궁전을 허물고 세워진 예수회 성당(Iglesia de la Compañía de Jesús)이 있습니다.
이 성당들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을 해야겠군요.

광장 뒤로 언덕 위까지 빼곡하게 집들이 들어차있는걸 보면 아 여기가 남미로구나~ 싶죠.

광장에서 태양 거리(Av El Sol)를 따라 500 미터쯤 내려오면 도로변에 너른 풀밭이 있는데

그 뒤로 우뚝 서있는 건물은 산토 도밍고 성당(Convento de Santo Domingo) 입니다.

그런데 성당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 뭔가 좀 심상치 않죠?
윗쪽 성당 본 건물의 전형적인 유럽식 벽돌 축조와 달리 벽돌이라기보다 큰 덩어리의 돌에다
금을 그어놓은 듯 빈 틈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이것은 잉카 시대의 건축물입니다.
철기 도구를 제조할 수 없었던 잉카는 돌의 갈라진 틈에 쐐기를 박아넣고 물과 불을 통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여 쪼갠 뒤 벽돌이 들어갈 자리에 딱 맞도록 모래로 연마함으로써
벽돌 사이에 접착제(모르타르)가 필요없는, 벽돌만으로 이루어지는 건축을 추구했습니다.
즉 어느정도 규격화된 벽돌을 요령껏 쌓는게 아니라 벽돌 하나하나가 전부 맞춤 제작인 거죠.
그러니 당연하게도 이런 건축물을 만드는 데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동력, 자금이 요구되었고
그를 통해 만들어진 칼같은 결과물은 만든 이(주로 황제)의 권력과 재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물론 서민들까지 이런 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으므로 건물의 주인이나 용도에 따라 건축물의
완성도가 달라지는건 마추 픽추에서 이미 보아온 바이나, 역시 수도의 것은 확실히 다르네요.
그 중에서도 태양의 신 인티에게 바쳐진 코리칸차(Coricancha, 케추아어로 황금의 사원)에는
그 중요성과 상징성으로 미루어 당시 가능한 최고의 기술과 노력을 쏟아부었음이 확실합니다.
벽돌을 쌓아 만들었지만 석재들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커다란 바위처럼 조직된 코리칸차는
1650년과 1950년의 큰 지진에서 위에 지어진 산토 도밍고 성당의 일부분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별다른 피해 없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피사로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황금의 사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원의 곳곳은, 심지어 외벽 위까지도, 다량의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잉카의 많은 건물들이 파괴된 뒤 새 건물이 세워지거나 잔해가 되어 세월 속에 흩어지는 동안
코리칸차는 산토 도밍고 성당 및 수도원의 토대 및 중정이 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방과 벽들을 보면... 너무나 매끈한 나머지 나무 합판에 그린 그림이 아닐까
싶을 정도죠. 건물 모형을 이렇게 만들면 현실성이 없다고, 무성의하다고 욕을 먹을텐데~

이 방도 원래는 이렇게 황금으로 덮이다시피 했을 걸로 추측됩니다.
스페인 세력과 처음 조우하여 해프닝 끝에 사로잡혀버린 13대 황제 아타우알파(Atahualpa)가
해방을 위한 몸값으로 자신이 잡혀있던 방을 모두 채울 만큼의 엄청난 황금을 제안했을 때
그 황금의 대부분은 코리칸차에서 수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사로는 그걸 모두 녹여버렸죠.

코리칸차는 또한 하늘의 별을 보며 점을 치는 천문 관측의 장소이기도 했는데
내부 한 켠에는 당시 잉카 사람들이 보았던 밤하늘의 은하수를 나타낸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밝은 별들을 이어 별자리로 만들었던 서구와는 반대로 은하수 속의 어두운 부분을 사람이나
동물로 보았다는게 재미있네요. 이 때는 이걸 그냥 가볍게 보았구만... 며칠 뒤 그럴 줄은..;;

파차쿠티, 투팍 잉카 유판키, 우아이나 카팍 3대에 100년이 채 안되는 전성기가 끝나자마자
황위 계승을 놓고 다툰 내전과 스페인의 침략이 겹쳐 잉카 제국은 순식간에 몰락하였습니다.
아타우알파의 처형 이후 괴뢰 황제로 세워진 망코 잉카 유판키(Manco Inca Yupanqui)가
쿠스코를 탈출하면서 입장을 뒤집어 스페인에 대한 결사 항전을 외치게 되는데~

망코 잉카 유판키의 이야기는 조금 뒤에 다시 이어가기로 하고,
쿠스코 시내에는 지금도 잉카 시대의 돌담이나 도로가 남아 그대로 사용하는 곳이 많습니다.

한 골목에는 잉카의 변태(...)에 가까운 돌 끼워맞추기를 보여주기로 유명한 12각 돌이 있죠.
저렇게 톱니처럼 물려놨으니 어지간한 지진이 닥친들 꿈쩍할 리가. -,.-

자 이제 쿠스코 북쪽으로 올라가보기로 합니다.

계단과 경사로를 따라 계속 계속 올라갑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도 숙박 시설이 많네요. 사이사이 차 한대 지나는 골목도 섞여 완전히 미로~

주거 지역을 모두 통과하여 산 크리스토발 광장(Plaza San Cristobal)에 이르렀습니다.
기념품을 파는 저 원주민 아주머니(할머니?)는 간이 베틀(?)로 직접 천을 짜고 계시더란;;;;
여기도 충분히 전망이 좋지만 우리는 더 올라가야 합니다.

여기가 해발 3,700 미터였던가, 쿠스코에 도착한 첫날을 생각하면 결코 쉬운 높이는 아니구만
그래도 며칠동안 적응하고 비니쿤카에서 5천 미터도 찍고오고 해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게...

목적지인 삭사이와망에 도착했습니다.
쿠스코에서 왕왕 보이는, 사진에서처럼 색동 실로 치장한 라마나 알파카를 데리고있는 사람은
촬영 행상(?)을 하는 분들입니다. 같이 사진 찍으면 돈을 내야 하죠. ^^
화물 운반과 고기를 위한 라마와 털을 얻기위해 기르는 알파카는 모두 낙타의 친척 뻘인데
상대적으로 덩치가 크고 낙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털이 억세보이면 라마,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고 머리와 얼굴까지 북실북실한 털에 덮여있으면 알파카로 보면 됩니다.

쿠스코의 북쪽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이자 사원인 삭사이와망(Sacsayhuamán)은
케추아어로 만족한(배부른?) 매, 혹은 매의 둥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잉카의 전설에는 투팍 잉카 대에 퓨마의 모양을 본뜬 쿠스코의 머리로 지었다고 전해오지만
고고학적 조사 결과 인간이 손댄 흔적은 기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지금 남아있는 부분도
11세기 킬케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13세기 잉카가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는군요.

쿠스코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아 스페인 쫌~

수도에 인접한 대형 성채라는 점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남한산성과 비슷할 수도 있겠네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서쪽 끝에는 무유크마르카(Muyucmarca)라는 거대한 탑의 기단만이 남아있습니다.
삭사이와망에는 신전과 세 개의 탑이 있었다지만 모두 파괴되어 현존하는 것은 없습니다.

앞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스페인 세력에 온갖 굴욕을 당하다 쿠스코를 탈출한 망코 잉카는
단시간 내에 최대 2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소집하고 쿠스코를 포위하기 시작합니다.
포위망의 핵심은 당연히 이 삭사이와망이었으나 이곳이 중요하기는 스페인도 마찬가지였으니
결국 이곳을 두고 양측이 정면으로 격돌하게 되었죠. 처절한 전투 끝에 수많은 잉카인들의
시신을 남기고 요새는 결국 넘어갔으며 쿠스코를 둘러싼 전쟁은 장기전으로 변화합니다.
일단 정상에서 패닝 한 바퀴 돌리고~

지리적 위치상 쿠스코를 향한 남쪽은 절벽이므로 성채로서의 벽은 북쪽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스페인 세력에게 점령된 후 파괴되어 이렇게 보면 을씨년스러운 폐허같지만...

이 돌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거죠. 저 뒤에 사람과 옆의 돌을 비교해보면 크기가 대충?

완전히 스페인의 식민지로 떨어진 뒤 삭사이와망의 건물과 탑, 벽 등의 건축물은 해체되어
쿠스코에 세운 새로운 성당과 건물들의 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채의 기반을 이루었던, 너무 크고 무거워서 차마 옮기지 못한 거석들만이 지금까지 남았죠.

맞은편의 바위 언덕에 오르면 톱니같은 돌기 구조가 3층으로 쌓인 성벽이 잘 보입니다.
이런 지리적 잇점과 수십 배 이상의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고작 수 백의 콩키스타도르에게
패퇴한걸 보면 당시 양쪽 세력 병장기의 격차는 대체 얼마나 컸던 것인지..;;
쿠스코를 포위하고 대치한지 10개월, 망코 잉카는 갈수록 불리하게 전개되는 전황 속에
승산이 없다 판단하고 군대를 해산한 뒤 안데스 산맥 깊숙한 빌카밤바(Vilcabamba)로 이주,
(왕왕 에콰도르의 동명지로 오인되지만,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150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
네오 잉카를 세우지만 1572년 손자인 투팍 아마루(Túpac Amaru)가 스페인에 체포 처형되면서
잉카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눈을 왼쪽으로 돌리니 아까 걸어올라온 요새의 동쪽 끝 옆으로 언덕이 하나 있고...

그 위에는 크고 하얀 예수의 상이 서있습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상도 있지만 남미의 여느 도시들은 이런걸 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듯하더군요. 당신의 이름 아래 뿌려진 수많은 피들을 대체 어떻게 보셨을런지.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흘러 이젠 남미 출신의 교황을 맞게 되었으니 역사의 순환이란 참~

예수상의 앞에서 내려다본 쿠스코 시내. 아르마스 광장과 두 성당이 잘 보이네요.

이제 다시 내려갑니다. 올라갈 때는 구불구불해서 몰랐구만 빠른 길로 가로질러 왔더니
정말 가파른 계단을 끝도 없이 내려왔..;;

여기가 무슨 성당이었더라 기억이 안나네요. 작은 성당인데 별다른 건 아니고...

옆에 세워진 성모자상이 원주민을 본뜬 모습이라 인상적이었거든요.
국내의 성당들을 돌아다니면서 한국적인 모습을 표현한걸 많이 보았기에 더욱 반갑습니다.

여기는 잉카 박물관...이었으나 시간 관계상 들어가보지 못하고 패스. ㅠㅠ

잉카의 보물들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나 싶어 봤더니 귀금속 공예품 판매점. -ㅁ-

파차쿠티의 궁전터인 쿠시칸차(Cusicancha)는 유리벽을 둘러치고 공사중인 듯?

산 프란시스코 광장(Plaza San Francisco)을 지날 즈음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산 페드로 시장(Mercado Central de San Pedro)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현지인보다는 관광객 상대이긴 하지만 기념품부터 먹거리까지 어지간한건 다 있더라구요.
같은 물건이라도 리마보다는 훨씬 저렴하니 구입할 게 있다면 이쪽에서 찾아보는게~

잔돈이 안되어 즉석에서 갈아주는 과일 주스를 한 잔만 시켰는데 두 잔을 줍니다.
얼마 안 되는 동전이라도 마저 건넸더니 한사코 받지 않던.
여기 뿐만이 아니고, 이번 여행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십중팔구 무척 친절한 편이었네요.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최대한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기색이 역력했거든요.

쿠스코에서 먹은 현지식이라면... 먼저 치차론(Chicharrón).
쉽게 말해 돼지고기(물론 다른 고기도 가능) 튀김인데, 물론 튀겨서 맛없는건 없지요!
다만 간이 좀 강했는지 먹으면서 잉카 콜라를 엄청 들이켰던~

다음으로 먹었던건 로모 살타도(Lomo Saltado) 입니다.
쇠고기(등심)와 감자, 양파, 토마토 등등을 양념에 넣고 볶은 요리인데, 꽤나 맛이 좋지요~
물론 여기서도 잉카 콜라는 필수! 정말 페루에 있는 동안 물보다 잉카 콜라를 더 마신 듯?

페루의 술이라면 단연 피스코(Pisco)가 가장 유명합니다.
이카 지방을 오갈때 스쳐지났던 피스코 시(파라카스 바로 위)가 주산지였기에 붙은 이름으로
일단은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인데 처음 만들 때 오크통 대신 원주민의 항아리를 사용했기에
통의 향이나 색이 배어들지 않아 무색 무취...는 아니구나, 종류에 따라 포도향이 나긴 합니다.
주로 과즙과 설탕, 계란 흰자 등을 섞어 피스코 사워라는 칵테일로 만들어 먹는데
맛이 아주 좋더라구요. 게다가 만든 사람이 피스코를 듬뿍 넣었는지 한 잔에 취해버렸~~

마시고 나오다 벽에 재미있는 그림이 있길래 찍었습니다.
킹(마이클 잭슨) - 퀸(프레디 머큐리) - 잭(프린스) 이라니, 센스가 좋네요.

이렇게 마지막 밤이 오고, 페루 여행도 이렇게 끝났습니다.
끝났다구요.
...에에이, 또 이어집니닷!!
저 많은 낙서는 누가 그렸을까
사막에서 모래 장난을
세상 끝의 지배자
공중 도시를 찾아서
늙은 봉우리
무지개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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