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Ride of the Glas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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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스파이인가 아내인가 by glasmoon



칠흑과 같은 어느 건물 안. 화려한 가면을 쓴 아름다운 여성이 조심스레 금고의 다이얼을 돌린다.
육중한 금고의 문을 힘겹게 여는 찰나 다른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는다. 바닥에 구르는 손전등.
그녀는 반대편을 향해 달려간다. 그가 무언가 소리치는 듯하지만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의 손에서 불을 뿜는 권총.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쓰러진 그녀를 그가 달려가 끌어안는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쓰다듬으려던 손이 힘없이 떨어지면서 그녀가 눈을 감는다. Fin.

영화의 서두를 장식하고 또 극중 몇 번인가 반복되는 이 짧은 흑백 극중극을 보면서 관객들은
이 작품이 어떤 구조로 어떤 갈등 속에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어느정도 예상하게 된다.
그러나 관객들은 현실(극중의 세계)이란 영화(극중극)처럼 단순 명료하지 않다는 것 또한 안다.



연극적으로 과장된 연기와 발성이 일본 드라마와 영화의 특질 중 하나이기에 초반 살짝 모호했으나
연기는 물론 동선과 촬영까지 연극적인 기조를 견지함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명백한 의도이다.
1940년대 초 일본 고베에서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후쿠하라 유사쿠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사토코는
하인이 딸린 커다란 저택에서 고급 위스키를 즐기며 취미로 영화를 찍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산다.
하지만 어쩐지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만 같은 그들의 말과 행동은 마치 성공한 젊은 사업가와
사랑받고 아름다운 아내의 역할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삼각 치정극처럼 느슨했던 분위기는 중반 유사쿠의 만주 여행과 함께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지만
'더 위험해지기 전에 대륙을 직접 보고싶다' '나는 만국 공통의 정의를 따르는 코스모폴리탄이야'
'당신이 스파이라면 나는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어요' 처럼 장르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대사들은
그들의 입을 거쳐 발화됨으로써 도리어 설득력을 잃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지루한 일상 속에서 낭만적 일탈을 꿈꾸던 부르주아의 치기어린 모험담인가?
소용이야 있었으랴만 미행을 감시한 뒤 남편의 눈이 되었다며 소녀처럼 기뻐하는 아내의 모습이나
진실 폭로하는 목적보다 미국에 간다는 행위에 들떠있는 남편의 모습은 한편 그렇게 보이기도 하나
(정의를 위해 일본을 버리고 서구로 망명하겠다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탈아입구 脱亜入欧 인지도)
예쁘고 달콤한 과자와도 같았던 이 부부의 관계는 몇 번이나 예고되었던 것처럼 쉽게 바스러진다.
'총질이 오가고 배신이 난무하더라도 내 여자(혹은 남자)에게는 따뜻하겠지' 라는 장르의 법칙을
뒤집는 쾌감보다 감정을 이입할 대상을 잃어버린 당혹감과 함께 극의 모호함은 극에 달한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이었을까. 왜 그런 선택을 했고 그 결과에 행복했을까.
그리고 끝내 미국으로 떠난 사토코가 찾는 것은 진정 남편이었을까.

전쟁, 정의, 사랑과 같은 거창한 담론을 말하지만 실은 인간 심리의 미묘함과 모호함을 다룬 영화.
다만 이 관점을 따르면 731 부대의 만행마저 영화적 장치로 소모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겠으나
작중에서 '누가 보아도 명백한 악행'으로 인용된 만큼 일본 영화로는 여전히 이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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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ㄷㄴ 2021/03/30 02:46 # 삭제 답글

    이거 일본에서 흥행했나요?
  • glasmoon 2021/03/30 13:19 #

    찾아보니 이게 원래 NHK 드라마로 방송된 거라네요. 이후 화면비와 색상 등을 조정한 극장판이 만들어졌고 베니스에 출품되어 수상했습니다.
  • 포스21 2021/03/30 08:04 # 답글

    왠지 미국 영화 트루라이즈... 가 생각나네요. ^ ^
  • glasmoon 2021/03/30 13:20 #

    고전적인 분위기로 보면 브래드 피트와 마리옹 꼬띠아르가 나오는 "얼라이드"도 생각납니다. 물론 그쪽은 내용도 고전적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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