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단순히 잡티를 지우거나 톤을 조절하는 수준은 뽀샵으로 치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다.
각종 필터는 기본이요 다중 노출하여 합성하거나 전체적인 색감을 바꾸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보정이 심해진 나머지 예쁘긴 한데 직접 본 광경과 완전히 딴판으로 보이는 정도가 되면
그 광경에 담긴 나의 기억과 감정마저 함께 변질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화도 디지털 후보정이 일반화되면서 화면을 지배하는 색감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복고 분위기를 위해 세피아톤을 입히거나 현대적 느낌을 위해 푸른 톤을 강조하는건 기본이다.
언젠가부터 사극 영화는 매우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감과 의상의 '때깔'이 입혀지기 시작했고
이는 곳 사극이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하나의 무기이자 사극의 정체성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은 왕실과 지배 계급의 전유물이므로 절대 다수의 상민들에게는 해당 없을 터,
그렇다면 영화에서 색감을 배제해 버린다면 어찌될 것인가?

영화 "자산어보"는 지지리도 가난한 먼 바다의 작은 섬마을, 그것도 주변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은 색으로 보일 지경이라는 흑산도(黑山島)가 배경이요 거기에 유배온 죄인이 주인공이니
종래의 사극처럼 화려한 색감을 강조하고 싶어도 마땅히 드러낼 색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영화 연출가라면 일생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한 번이라도 할까 말까 싶은 이 작업을
이준익 감독은 2015년의 "동주"에서 이미 시도한 바 있고, 이번에 그걸 다시 했다.
허나 그렇게 색이 사라진 자리에 6년 전에 들어간 것이 윤동주로 대표되는 순수함의 상징이자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을 불러내는 영정의 감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전근대의 야만성과 함께
고고한 철학적 이상을 논하는 것보다 무엇 하나라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던 한 학자의
내면 속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한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질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좋은 시절을 뒤로하고 더없이 험한 일을 겪으며 삶에 대한 의지마저 잃어가는 학자 정약전.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며 공부에 열중하지만 역부족에 막혀버린 어부 창대.
비록 궁핍한 변방의 유배지이나 이들이 바다를 끼고 문자 그대로 수어지교(水魚之交)를 나누는
이 섬이야말로 약전이 환멸하고 창대가 추종하는 유교적 이상향이 아닌가.
수묵화 그대로인 화면 속에서 학자와 상민이 함께 배워나가는 조화로운 섬 속의 면면에 비해
창대가 이상과 욕망을 좇아 뛰쳐나가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과 마주하는 뭍에서의 면면들은
상대적으로 단조롭고 관습적인 장면처럼 보인다는게 다소 아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과 백으로 넘실대는 자산의 바다는 쉬이 잊혀질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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