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티아고 순례길을 본딴 올레길 걷기와 함께 제주살이가 유행처럼 번진 지도 어느덧 십 년여.
실제로 내려간 경우를 내 주위에서도 의외로 꽤 찾을 수 있으니 정말 유행은 유행이었나보다.
물론 저마다 사정이야 있었겠으나 그들 중에는 이제 나름 자리잡고 사는 이가 있는 반면
앗뜨거를 외치며 금새 돌아온 이도, 오래도록 고생만 하고는 더 어려워진 이도 있다.
그렇게 제주살이의 열풍이 지나간 자리에 여기 태구씨가 새로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결국 이 단어 하나로 귀결되듯 태구씨의 제주행도 도피에서 시작되었다.
그래 뭐 젊은 나이에 수습 안되는 사고를 쳤으면 어디 멀리 짱박혀서 잠수탈 수도 있는 일이지.
근데 숙식을 신세지는 집에 사고쳤던 원인을 그대로 가진 여자애가 있는건 우연일까 운명일까?
또 사고를 수습해준다며 나만 믿으라던 형이 사고를 더 키워버린건 실수일까 고의일까?
여자애는 계속 대들고, 일은 계속 꼬이고, 아니 내가 이러려고 제주에 온 건 아닌데~

한 성깔 하는 걸로 유명한 기타노 다케시에게 박훈정 감독이 사전 양해를 구했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것처럼 바다를 바다보는 카메라부터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폭력까지
오키나와가 제주도로 바뀌었을 뿐 "소나티네"를 생각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잖아.
첫 사고 장면부터 장르물의 클리셰와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이 영화를 그래도 끌고가는
절반은 배우들의 몫이다. 걸걸한 태구씨와 앙칼진 여빈씨의 합도 의외로 좋았거니와
이보다 더 지질할 수 있을까 싶은 호산씨, 그리고 독특하고 매력적인 악역을 구축한 승원씨까지.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역시 시선을 돌릴 때마다 화면을 메워주고 있는 제주도의 풍광일 터.
일상으로부터 시공간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곳에 좋은 경치와 음식이 있으면 그게 낙원이지 뭐야.
하지만 그걸 일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순간 낙원이 지옥으로 변한다는 걸 태구씨는 왜 몰랐을까.
그래서 난 제주살이는 바라지도 않으니 언젠가 나이먹어 은퇴한 뒤 두어 달 내려가 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이런 소망 정도는 가질 수 있잖아.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