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Ride of the Glas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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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죽었네 친구, 아직 안죽었어! by glasmoon



그의 이름을 처음 본 것은 1980년대 중반, 어떤 소년지의 영화 특수효과 소개 코너였습니다.
제가 그걸 한참동안 들여다본 이유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멋진 기계와 탈것들 때문이었지만
그와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어진 영화가 이것 1984년작 "네버엔딩 스토리"였거든요.
처음 듣는 제목이었지만 자그마하게 소개된 사진들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수년 뒤
영상을 직접 보고난 뒤에는 SF 일변도이던 제가 반해버린 첫 번째 판타지 영화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 할리우드식 액션 영화들의 틈바구니에서 1993년작 "사선에서"는 꽤 독특했습니다.
옛 서부극의 아저씨가 백발에 피곤한 얼굴로 뛰어다니고 ("더티 해리"를 보기 전이었습니다)
테러범(존 말코비치를 여기서 처음 보았습니다)은 분명 싸이코인데 묘한 매력이 있었죠.
겉모습은 달라도 내면은 닮은꼴인 프로페셔널한 두 사나이가 영혼의 맞다이를 뜬다는 전개는
폭풍같은 청소년들에게 꽤나 어필했고, 수년 뒤 마이클 만의 작품들에서 그 정점을 찍습니다.


글래디에이터 이후 이후 서사 대작들이 쏟아져나온 2000년대에도 그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킹 아더"가 모양 빠지는 재해석으로 망하고 (매즈 미켈슨을 메이저 데뷔시킨 공로만은 컸죠)
"킹덤 오브 헤븐"이 지나친 편집으로 물먹는 사이 (수년 뒤 감독판으로 평가가 뒤집히지만서도)
2004년작 "트로이"는 압도적인 물량과 명배우들의 열연으로 박터지는 전장의 승자가 되었죠.
특히 망국의 왕에 분한 피터 오툴(프리아모스)의 모습은 볼때마다 눈물을 주체할 길이..ㅠㅠ


이상의 쟁쟁한 작품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작품을 꼽으라면
십중팔구 1981년작 "특전 유보트"의 차지가 된다는 것에 아마도 이견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한 소년에게 잠수함이라는 특수한 여건과 함께 전쟁의 참상과 본질을 아로새기며
그 소년이 전쟁(반전) 영화, 그 중에서도 일련의 잠수함 영화에 빠져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 영화가 어느덧 40년이나 되었다니!!

이 감독은 "특전 유보트"의 성공으로 할리우드에 영입되어 훨씬 큰 규모의 작업을 하게 되었지만
비슷한 시기 영입된 영미권 바깥의 감독들 중 다수가 할리우드보다 더 할리우드스럽게 되거나
(롤랜드 에머리히 등) 자기 색깔을 버리지 못해 튕겨나가는(폴 버호벤 등) 경우와는 달리
할리우드의 스타일에 자신의 색을 절충(타협?)하여 양립시키는 드문 예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마저도 2006년작 "포세이돈"이 폭망한 뒤에는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요.

볼프강 페테르젠(Wolfgang Petersen), 페터젠, 페터슨 등 여러 발음으로 불리는 이 감독이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지난 2022년 8월 12일에 8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라면 왠지 해협 바닥에 가라앉아있다 기적적으로 부상했던 어떤 배의 함장이 외쳤던 것처럼
떠나면서도 아직 안죽었다며 농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

  • rumic71 2022/08/20 03:25 # 답글

    역시 그게 제일 명대사였죠. Not yet c'mon! Not yet!
  • glasmoon 2022/08/22 14:50 #

    컴컴한 바다에 보이는 것도 없는데 속도의 쾌감이 가슴속으로 직접 꽃히는 장면이었죠!
    그러나 돌아간 모항에서... ㅠㅠ
  • 도그람 2022/08/20 15:59 # 삭제 답글


    볼프강 감독의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본 게 많았어요 트로이 에어포스 원 아웃브레이크 특전유보트
    이제는 볼프강 감독도 추억의 한편이 되었네요...
  • glasmoon 2022/08/22 14:55 #

    에어포스원이야 워낙 히트했고, 소더버그의 컨테이전 이전에 전염병을 경고했던 아웃브레이크를 다시 챙겨본다는게 미루는 사이 이렇게;;
  • EST 2022/08/21 05:06 # 답글

    다시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최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던 터라 <트로이>의 감흥을 다시 되짚으며 첫 관람 당시 적었던 글을 뒤적였는데, 신화 덕후값 하느라 영 시원찮다는 식으로 적어는 놨지만 그래도 즐겁게 본 것과 특정 장면에 대한 호의만은 잊지 않았더군요. 두 용장의 일기토부터 이어지는 프리아모스가 단신으로 아킬레우스를 찾아가는 장면은 해를 거듭할 수록 눈물을 자아내는 극적인 대목입니다.
  • glasmoon 2022/08/22 15:02 #

    예전에 피터 오툴옹 돌아가셨을때 트로이 포스팅을 하면서 에스트님과 그 장면의 소회를 덧글로 주고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이래저래 양산형(?) 서사극 취급이었지만 몇몇 두드러지는 부분들이 확실히 있어서 갈수록 높게 평가하게 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BigTrain 2022/08/24 10:11 # 답글

    지난 일요일 EBS에서 퍼펙트 스톰을 방영하던데 아마도 감독이 작고하셔서 편성하신 모양이네요.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어부이시라서 제겐 참 남다른 영화였습니다.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 glasmoon 2022/08/24 16:36 #

    그러고보면 바다 영화는 높은 제작비에다 폭망 사례가 많아 할리우드에서 한동안 터부시되었던걸로 아는데
    페테르젠 영감님은 유보트로 시작해서 그런가 그쪽으로 노하우가 있었나 봅니다...만 영감님 커리어 끝장낸 것도 "포세이돈";;

    아버님께서 바다 일을 하셨었군요. 좋은 곳에서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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