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덴하흐(헤이그), 암스테르담에 이은 네덜란드 날림 여행 세 번째 목적지는 로테르담입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오후 기차를 타고 다시 로테르담을 향합니다.
예정대로 암스테르담 -> 덴하흐 -> 로테르담 순서로 진행했다면 거리와 비용도 단축하면서
덴하흐와 로테르담 사이의 델프트도 어떻게 들러봤을텐데 어쩔 수 없이 빠져버린게 아쉽네요.
아름다운 옛 도시이자 베르메르(페르메이르)가 작업한 곳이자 그가 그린 그림의 배경이기도 한데.

로테르담은 네덜란드 제2의 도시이자 유럽 최대의 항구, 그야말로 유럽의 현관입니다.
네덜란드 자국은 물론이거니와 인근 국가들을 포함하여 유럽 물동량의 60% 이상을 처리한다죠.
정말 한 구역 안에서만 머물렀던 덴하흐, 센트룸에서 요리조리 맴돌았던 암스테르담과 달리
로테르담은 예정된 동선이 좀 긴데 잘 되려나;; 지나서 말이지만 잘 되지 않았다는 얘기죠;;;

어쨌든 늦은 오후 로테르담 중앙역에 도착했습니다. 뭔가 엄청난 역에 대한 얘기는 일단 미루고,
이번 여행을 통틀어 암스테르담의 일정이 가장 빡빡했던터라 이미 이때 약간 정줄이 오락가락~

찾아들어간 숙소에서 잠시 기절해있다가 야경을 보겠다고 다시 기어나왔습니다.
예쁜 마켓 홀의 불빛을 보겠다고 나왔구만 블락 광장은 장터인지 축제인지를 했는지 난장판,
무엇보다 시간은 이미 밤을 향하거늘 해가 안져요. 해 지기 전에 시장이 먼저 닫을 판. orz

기웃거리다 길을 따라 나우어마스(Nieuwe Maas) 강변으로 걸어왔습니다.
로테르담을 상징하는 에라스무스 대교와 랜드마크 격인 여러 고층빌딩들이 보이네요.
일정상 저 다리를 건너 저 빌딩들을 지나 저 끄트머리 어딘가에서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는데
여기서부터 한 4 킬로미터 정도 걸어야 한다고 말했더니 좀전부터 침묵하던 일행이 폭발!
아니 이 동선 댁이 짠거잖수!!

결국 이후의 일정은 모두 접고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급히 뒤적거려 식당을 찾았습니다.
관광 지구가 아니어서 늦게까지 연 식당이 좀처럼 없었는데 그래도 한 곳 있어서 다행이었죠.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 안에만 손님이 가득하니 이곳이 바로 현지인의 맛집이렸다~?
아닌게아니라 맛(특히 문어)도 좋았구요, 옆 테이블의 건장한 형님 두 분이 진지하게 대화하며
접시와 맥주잔을 비우더니 다시 피자를 각 하나씩 주문해 먹는걸 보고는 빵 터져버렸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요리 접시(제 경우엔 문어)가 전채(에피타이저)같은 거였나봐요.
그럼 우리 테이블은 1인분을 시켜서 둘이 나눠먹은 셈인데, 어이쿠 위장이 작아 죄송합니다~

아무튼 본의는 아니었지만 여행 나흘만에 처음으로 여유롭고 풍요로운(?) 식사를 즐긴 바,
이후의 일정을 위해서라도 로테르담에서는 다소 느긋하게 산책하듯 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로테르담 중앙역!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 거대한 삼각형은 1957년에 세워졌던 구 역사를 대체하면서
2014년 완공되었습니다. 이 과감함 모습은 건축의 도시 로테르담의 현관으로 손색이 없군요.
구 역사로부터 물려받았다는 'CENTRAAL STATION' 글자와 시계도 전혀 위화감이 없구요.

중앙역에서 중심가를 향해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니 수로가 시작되는 위치에 동상이 있습니다.
'불굴의 저항(Ongebroken verzet)' 이라는 이름대로 이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네덜란드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에 대한 네덜란드의 저항 의지를 되새기는 것이겠죠.

2차대전사에서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프랑스 전역의 곁가지로 두어 줄 언급되는게 보통이지만
한 나라가 넘어가는 과정이 그렇게 단순할 리는 없습니다. 5월 10일 개전과 동시에 네덜란드를
침공한 독일은 나흘 뒤인 5월 14일 최후 통첩에 이어 시범 케이스로 로테르담을 폭격한 결과
약 800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도시 중심가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무차별적인 공습 앞에서
이를 막을 방어 수단은 사실상 없었고, 위트레흐트 폭격까지 예고하자 항복할 수밖에 없었죠.

전날 저녁 한 바퀴 돌 때도 에라스무스 대교의 끝에서 기념탑을 볼 수 있었는데요.
전쟁기 저항 운동이 활발했던 네덜란드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로테르담이고보니
전쟁에 대한 경각심이랄까 그런 부분은 아마 가장 민감한 도시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임에도 대규모 폭격을 당하면서 시가지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유럽의 옛 도시 답지않게 현대식 빌딩이 즐비하다는 것이 현대 로테르담의 특징입니다.
배가 다니지 않는 얕은 수로의 좌우를 따라 현대적인 조각 작품들도 줄지어 서있고 말이죠.

그 와중에 단연 눈에 띄는 거라면 이것! 마치 거인의 땋은 머리채를 그대로 잘라 세워둔 듯한데
모르긴 몰라도 실제 와이어를 꼬아 만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미국 미술가 폴 매카시(Paul McCarthy)의 문제작 중 하나인 "산타 클로스"도 이곳 로테르담의
엔드라흐트 광장에 있습니다. 저 산타를 보면서 오른손에 들고있는게 대체 뭘까 궁금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섹스 토이 중 하나인 엉덩이 플러그(...)를 떠올렸고 개방적인 네덜란드라 해도
썩 환영받지는 못했는지 설치 장소를 찾아 여기저기 전전했다네요. 물론 지금은 명물이 됐지만~

저에게 가장 놀라운 조각상은 숙소에 거의 도착하여 방심한 찰나에 맞닥뜨렸습니다.
어, 이거, 아마도 파손의 위험으로 V 안테나는 간략화한 모양이지만, 분명 V2 건담인데 말이죠.
더욱 놀라운건 작가 이름과 작품 제목도 따로 있다는 건데, 토미노옹과 카토키가 알랑가 몰라??

몸 상태 탓인가 우울하던 하늘이 밤사이 좀 개었군요. 수로를 따라 남쪽으로 산책을 가봅시다.

나무들 사이로 공중 부양하고 있는 한 그루 발견!
별도 조명을 받고 있으니 이 또한 작품이란 얘긴데 무슨 의미인지는 도통 모르겠네요. -,.-

대로변의 가건물(...)처럼 생긴 특이한 건축물은 쿤스탈 로테르담(Kunsthal Rotterdam)입니다.
유명 건축가 렘 콜하스(Rem Koolhaas)의 설계로 알려진, 로테르담 아트홀 쯤 되는 건물이죠.

자체적인 콜렉션을 가지지는 않고 여러 전시나 공연 외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시설입니다.

재미있는건 바닥이 평평하지 않고 기울어진데다 엇갈려있다는건데... 무슨 소린가 싶으시겠죠?

그러니까 대학교의 대형 강의실이 상하좌우로 엇갈려있는것 같다면 쪼금은 이해가 되실라나~
저도 직접 경험해보면 더 좋았을 것을 아직 이른 시간이라 바깥에서 구경했을 뿐입니다만~

쿤스탈에서 대로를 건너 공원으로 들어갑니다.
이름이 정말 '공원(Het Park)'입니다. 28헥타르가 넘는 엄청나게 크고 오래된 공원이죠.

세 소녀가 춤을 추는 분수대가 있군요. 근데 도시 역사도 그렇고 딱 스탈린그라드 생각이..--;;

네덜란드의 국민 시인인 헨드릭 톨렌스(Hendrik Tollens)의 동상도 있네요.
다른 동상도 많다는데 공원이 워낙 넓어서~

공원 서쪽 바깥으로 보이는 남산 서울타워를 닮은 전망대는 유로마스트(Euromast)입니다.
음 가만히 보니 대칭에 원통형인 남산 타워와 달리 배의 돛대처럼 진행 방향을 가진 듯?

커다란 조개껍질과 흩어진 진주 목걸이는 마들렌 베르케머(Madeleine Berkhemer)의
"잃어버린 진주(De Verloren Parel)"입니다. 베르케머는 왕년 스타킹을 찢어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작가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런 재미있는 설치 작품도 있었군요.

공원을 관통하여 남쪽 끝으로 나오면 나우어마스 강입니다.
강 건너편 빌헬미나 부두 쪽에 들어선 크고 높은 건축물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 가운데가
묘하게 엇갈린 것만 같은 건물이 이름부터 대담한 '드 로테르담(De Rotterdam)'입니다.
앞서 쿤스탈과 함께 렘 쿨하스의 설계로 연면적 기준 네덜란드 최대의 건물이라죠 아마.

아침 산책을 끝내고 슬슬 북쪽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개장 시간이 다가오고 있거든요.

거대한 스뎅 그릇 밖에서 입장 시간을 기다리며 잠시 거울 놀이도 하구요.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아닌, 소장품들을 보관 연구하는 창고마저도 관람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보이만스 판 뵈닝언 수장고(Depot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미술관과 박물관에 비해 기획이나 큐레이션 쪽의 부담은 덜할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벽 사이로 들어가있는 것들을 한 번 바꾸려면 작업 난이도는 훨씬 높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이만스 판 뵈닝언 수장고 - 예술을 담은 그릇

가는 날이 장날, 아니 가는 달이 로테르담 건축의 달이라고 맞은편 새로운 연구소(HNI)에다
가설 계단과 루프탑을 만들어놨으니 올라가봐야죠?

서유럽에서 드물게 각양각색의 현대 건축물들이 잘 어우러진 모습이 근사해 보이면서도
그 아래에 철저한 파괴와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조금 복잡해집니다.
우리나라도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비슷한 상황을 겪기도 했구요.

이제 블락 거리로 장소를 옮깁니다. 정육면체 방들의 숲 큐브 하우스가 이곳에 있지요.

아기자기하고 색다른 공간은 확실히 재미있는데 직접 들어가 쭉 살아야 한다면 좀..?
어차피 맞춤이겠다 가구까지 완비된 상태에서 몸만 들어온다고 한다면 혹한가..??
아니 지구 반대편에 사는 외국인이 왜 이걸 고민하는건데~~
큐브 하우스 - 비범함과 불편함의 상관관계

큐브 나무의 숲을 내려다보는 연필의 탑도 한번 봐주구요.

스뎅 그릇에 이어 엎어진 과일 바구니? 마켓 홀에도 다시 왔습니다.

시장 위를 거대한 아치로 덮고 그 좌우를 아파트로 삼는다는 아이디어도 아득하지만 그걸
정말 만들어버리는걸 보면 건축에 대한 로테르담의 진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예산과 비용을 따지면 절대 못할것 같은데 말이죠.

시장 앞 광장의 북쪽 끝에서 드디어 옛 건축물을 만나니 정말 반갑기 짝이 없습니다.

성 로렌스 교회(Grote of Sint-Laurenskerk)는 15세기 말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세워졌습니다.
1572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교회가 되었다는건 암스테르담의 성당(교회)들과 마찬가지구요.
그래도 암스테르담과 같은 적극적인 성상파괴운동까지는 겪지 않았었는데...

성당파괴운동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쟁의 폭격을 맞아버렸죠.
1940년 폭격과 그로 인한 화재로 소멸되다시피한 구시가지에서 시청사 등과 함께 살아남은
극소수의 건물 중 하나이며 중세에 만들어진 건물로 한정한다면 유일한 생존의 예가 됩니다.
물론 기초와 석재가 남았을 뿐 목재 부분은 불타버려 기나긴 복원의 시간이 필요했구요.

로테르담의 역사를 목격한 증인으로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아 평화의 시대에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는 기념탑이 될 줄 알았는데... 또다시 전쟁을 걱정해야 하는 때가 벌써 올 줄이야;;

교회 근처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아마 이탈리아 남부의 스트리트 푸드 스타일이었나봐요.
만두 비슷하게 보이는게 판체로티(panzerotti), 샌드위치 비슷하게 보이는게 푸체(pucce).
비교적 저렴한데다 맛도 좋았던 듯? 공교롭게도 로테르담의 음식은 이탈리안에 문어인 걸로!

배를 채웠으니 마지막으로 다시 강을 향해 전진!
물길(로테 강..이라기보다 천)이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도 평범을 거부하는 건물들이~

시간상 거리상 에라스무스 대교(Erasmusbrug)를 건너보기는 글렀으니...

가까운 빌럼스 다리(Willemsbrug)를 건너보기로 합니다.
앞에 보이는 교각은 이제는 해체된 철교의 것으로 조각가 아우케 더 브리스(Auke de Vries)가
만든 작품 "마스빌트(Maasbeeld)"가 빌럼스 다리와의 사이에 길게 걸려있습니다.

사실 빌럼스 다리는 수단에 불과했고, 그 다리를 건너온건 이 다리를 보기 위함이었죠.
'승강기(De Hef)'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승개교 코닝스하벤 다리(Koningshavenbrug)입니다.

네덜란드에서 배의 운항은 필수적이므로 모든 다리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충분히 높던가
그렇지 않다면 필요할 때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도개교가 되던가 해야만 했습니다.
브레다-로테르담 철도 노선의 일부인 코닝스하벤 다리가 1878년 처음 놓였을 때는 중앙부가
회전하는 스윙식 도개교(선회교)였으나 배가 다닐 수 있는 공간이 좁아 사고가 빈번하므로
새로운 승강식 도개교(승개교)가 설계되어 1927년 완성되었고 도시의 명물이 되었죠.
1993년 빌럼스푸르 터널(Willemsspoortunnel)이 개통되고 철도 노선이 옮겨지면서 다리는
더이상 사용되는 일 없이 기념물이 되었으나...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가 발주하여 로테르담에서 건조중인 요트 Y721이 너무나 큰 나머지
진수 후 바다로 나갈 때 이 다리의 일부를 해체해야 한다는 뉴스가 올해 초에 있었습니다.
물론 로테르담 지역 사회는 난리가 났고 저도 행여 다리가 철거될까싶어 보러간 거였는데
최근의 소식으로는 여론에 부담을 느낀 건조사가 눈을 피해 로테르담 바깥의 다른 조선소로
배를 옮겼고 그곳에서 완성한다고 하는군요. 어쨌든 다리는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로다~

철교 옆으로 나란히 놓인 차량과 사람 통행을 위한 코닝인너 다리(Koninginnebrug)는
마침 요트가 통과하기 위해 올려져 좋은 구경을 했네요. 언어에 밝은 분이라면 눈치채셨겠지만
네덜란드어로 코닝(koning)은 왕, 코닝인(koningin)은 여왕을 뜻합니다. 잘 어울리는 짝이죠?

다시 돌아나오다보니 코닝스하벤 다리 건너편으로 유니레버 네덜란드 건물도 보이는군요.
사실상 온전한 4층 건물 하나를 네 개의 파이프로 지지하고 있는 셈이니 충분히 대단하지만서도
이미 로테르담의 별별 신기한 건물들을 보고난 뒤라 아 그래 애썼구나 정도라는게 참 아하하.

로테르담의 알려진 많은 건축물들 중에 거리와 동선상 볼수 있는 것들만 쓰윽 훑어보았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이미 무리했고 안트베르펜에서 또 무리할 예정이라 쉬어가는 타이밍이었는데
사진은 왜 여전히 많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네덜란드/벨기에] 암스테르담 구두쇠 털어먹기
덧글
오늘 정리하신 사진을 보니 아마 극중 흘러나오던 덴마크 국가가 떠올라서 였던 것 같습니다.
혹은 술이 땡겼을지도??
매일같이 일정이 빠듯하다보니 제대로 술을 즐겨보지 못한게 아쉽구만요;;
그나저나 허공에 건물 짓는 거 되게 좋아하네요. 떠 있는 부분에서 생활하면 불안불안할 거 같은데 말이죠.
베조스 같은 거 때문에 다리를 해체한다는 건 이해가 안 되네요. 지 돈 들여서 해체 원복 한다해도 허가해 줄 일이 없을 거 같은데 왜 때문에?-_-?
물론 욕은 베조스가 다 먹었습니다 캬캬~